자동차를 버리고 임도를 버리고 봄기운에 풀린 물소리가 졸졸졸 들리는 계곡으로 접어든 채 남해 금산 한 골짜기를 헤맬 때,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각은 두개골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외부의 저 숲속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게 아닐까. 얼크러진 바위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들, 하늘로 잇닿을 것처럼 꼬부라져 돌아가는 계곡에서 난데없는 생각들이 툭툭 뛰어나와 나를 자극하니 그런 느낌이 아니 들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만나지 못할 이런저런 생각들이 분명했다.

물웅덩이에 제 그림자를 비춰보는 나무들은 무심하고 태연하다. 겨드랑이가 무척 근질근질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돌 가운데의 어느 나무 가지에는 새의 깃털이 꽂혀 있고 상류에서 떠밀려온 것들이 낑겨 있기도 하다. 비바람에 씻겨 풍화하는 작년의 흔적들. 이 고요하고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골짜기에도 무서운 일들이 끊임없는가 보다.

이른 봄이면 남녘을 수놓는 노오란 꽃잎의 삼총사가 있다. 산수유, 히어리 그리고 생강나무. 산수유는 차창 밖의 밭에서 많이 보았고 히어리는 보리암으로 오르는 초입에 우세하였다. 나머지 하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멀리서 노란색이 공중으로 톡톡 번지고 있다. 틀림없는 생강나무였다. 꽃잎을 코끝에 대면 은은한 향기가 좋다. 히어리가 조롱조롱 달린 등불, 산수유가 확 퍼져나가는 불꽃이라면, 생강나무의 꽃은 생각의 덩어리처럼 가지에 딱 붙어 묵직하게 기지개를 켠다. 가지나 잎을 문지르면 살캉살캉 생강냄새가 흘러넘치는 생강나무.

소슬한 침묵을 짚으며 바위를 넘고, 길들여지지 않는 돌을 딛고 계곡을 오르는 동안 세련된 사무실에서는 쓰지 않던 근육을 동원하느라 많이 노곤하였다. 덕분에 어느새 몸이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말랑해졌다. 돌은 자음, 물은 모음. 둘이 완벽하게 결합하면서 빈틈없이 꽉 짜인 문장을 부지런히 아래로 보내는구나! 남해 금산의 어느 편평한 돌팍에 앉아 생강나무 향을 만끽하면서 그런 부드러운 생각을 했다. 생강나무, 녹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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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