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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가끔 친구 문제에 대해 질문받는다. 가학적인 친구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경우, 이기적인 친구 때문에 늘 소극적인 분노 상태에 있는 젊은이들을 본다. 그러면 우선 이렇게 대답한다. “서른 살에도 친구 문제로 고민한다는 것은 시기 착오적이다.” 그런 다음 사마천의 <사기(史記)> 계명우기(鷄鳴偶記) 편에 나오는 네 종류의 친구 이야기를 해준다. 적우, 일우, 밀우, 외우.

적우(賊友)는 도적 같은 친구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친구를 사귀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친구는 상대가 더 이상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관계가 소원해진다. 일우(닐友)는 즐거운 일, 어울려 노는 일을 함께하는 친구이다. 적우나 일우는 친구의 어려움을 떠안을 마음이 없고, 나쁜 일이 생기면 상대방을 탓하기 십상이다. 밀우(密友)는 친밀한 마음을 나누는 친구이다. 비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내밀한 어려움을 부탁하며, 상대의 어려움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는 단계이다. 외우(畏友)는 서로 경외하는 친구이다. 존경하면서 장점을 배우는 친구, 허물을 말해주면서 도와 덕을 함께 닦을 수 있는 친구를 말한다.

계명우기의 네 가지 친구는 정신분석학에서 제안하는 인간 정신의 발달 단계와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적우는 초기 발달 단계와 관련이 있다. 출생 직후부터 인간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 시기 아동은 부모를 착취적으로 사용한다. 부모가 자기 닮은 아기를 보며 나르시시즘적인 기쁨에 빠져 있는 동안 부모의 자원을 도적처럼 이용한다. 이 시기의 아기는 부모를 마음껏,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건강한 정신 발달을 이룰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성인이 된 후에도 타인과의 관계를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초기 발달 단계에서 부모에게 충분히 의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생존과 성장을 위해 부모에게 편안히 의존하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채 무의식에 남아 있다는 의미다. 해결되지 못한 의존 욕구는 당사자를 추동하여 이기적인 대상 관계를 맺도록 만든다. 상대방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상대방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도 된다고 믿으며, 아무리 많이 받아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도록 한다.

일우는 사춘기 발달 단계와 관련된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 세계를 벗어나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심리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하면서 친구를 새로운 동일시 대상으로 삼는다. 거울처럼 친구를 보고 배우면서 친구와 함께 여행, 캠핑 등 즐거운 활동을 한다. 그렇게 세상을 탐험하면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자신감, 의리, 창의성 등 정신 역량을 키운다. 사춘기 아이들이 그토록 반항하는 이유는 부모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정 떨어지는 행동을 해야 정을 뗄 수 있다고 믿으며, 혹시 뒤따를지도 모르는 부모의 보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 “도적 같은 친구, 즐거운 일만 같이하는 친구,
친밀한 마음을 나누는 친구, 서로 경외하는 친구.
친구와 내 자신, 집단과 조직도 네 가지 방식이 얽혀 있다.”


가끔 어떤 남자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으면서도 가족보다 친구를 더 좋아하고,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아이가 아픈 시기에도, 아내가 피로를 호소해도 친구 전화를 받고 바로 외출하는 남편에게 실망한 아내들 이야기를 드물지 않게 듣는다. 그런 이들은 여전히 사춘기 발달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며, 사춘기에 제대로 친구 관계를 맺지 못한 트라우마가 내면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역할을 피하기 위해 친구 핑계를 대는, 아내의 적우일지도 모르겠다.

밀우는 청춘기 발달 단계와 관련된다. 청춘기가 되면 누구나 연애를 꿈꾸며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한 사람을 갖고 싶어한다. 그 친밀한 사람과 함께 내밀한 소망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친밀한 대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원가족을 떠나서 자기만의 가정을 갖는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친밀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인내, 배려, 헌신 등의 정신 기능을 획득해간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친밀한 관계는 성장기의 결핍과 좌절을 보살펴주는 기능을 한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누는 보살핌은 한 사람의 정신을 성장시켜, 주변에 사랑을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이끈다.

가끔 아내의 사랑을 두고 아들과 경쟁하는 남편,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는 딸을 시기하는 아내를 본다. 아들을 낳은 후 아내가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고 불평하는 남편, 시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남편을 보며 소외감을 느끼는 아내는 모두 친밀감에 무능한 사람인 셈이다. 주도적인 태도로 친밀감을 주고받아야 함에도 그저 아기처럼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뜻이다. 밀우의 범주 속에는 정서적 친밀감을 나누는 동성 친구도 포함된다. 하지만 친밀한 동성 친구에게 고착된 사람은 가끔 이성과의 친밀한 관계에 관심이 덜하다는 부작용이 있다. 그것은 여전히 사춘기적 일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뜻처럼 보이기도 한다.

외우의 자격은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면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정신 기능이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려면 먼저 공동체 구성원을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선배들의 지혜를 배우고, 사회에 통용되는 질서와 관습을 습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잘못을 범하면 빨리 개선하고 허물을 말해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존경하면서 배울 수 있는 친구나 선배를 만날 수 있다면 사회생활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서른 살에 가학적인 친구 문제로 갈등하는 일이 시기 착오적이라고 말한 이유가 거기 있다.

세상에는 네 가지 친구가 혼재되어 있다. 어떤 친구는 필요할 때 찾아와 필요한 것만 챙겨서 떠난다. 어떤 친구는 술자리나 게임 자리에 불러내고, 어떤 친구는 내밀한 이야기를 하염없이 털어놓으며 무의식적 치유 작업을 꾀한다. 어떤 친구는 그 삶의 모습만으로 가르침을 주고 허물을 알아차리도록 일깨워준다. 한 사람의 내면에도 네 가지 친구 요소가 존재할 것이다. 친구가 많다는 사실을 자랑하며 그것을 인간성의 척도쯤으로 여기는 이의 친구 그룹에도 네 가지 친구가 섞여 있을 것이다.

개인뿐 아니라 집단과 조직들도 네 가지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듯 보인다. 유기체와 같은 사회도 네 가지 발달 단계에 따라 생성·변화하는 듯 보인다. 우리 사회는 어느 발달 단계쯤에 위치하는지 혼자 생각해본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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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