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수상하니 날씨도 공중에서 갈피를 못 잡는가. 소한 지나고도 봄날같이 따뜻하다. 춘정까지는 아니고 가벼운 흥분을 이기지 못해 강화도 마니산을 찾았다. 함허동천. 입구의 입간판에 유래를 적어놓긴 했으나 그 뜻보다 먼저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혀끝을 툭 때리고 가는 것이 있었다. 마니산은 악산이다. 함허(涵虛)에 걸맞게 바위 주위에 검은 흙들이 이끼처럼 포진해 있다. 그래도 지하는 겨울이다. 서릿발에 꼬집힌 흙들이 주상절리처럼 세로로 꼿꼿하게 무리지어 서 있다.

114계단을 지나 드디어 바위능선에 도착했다. 사방의 툭 트인 호쾌한 풍경에 눈이 좁아지는 것 같다. 벌써 정유년의 세월에 제법 때를 묻힌 듯하지만 음력으로 따지자면 아직 설밑이다. 새해를 즐길 자격이 아직은 충분하다. 김밥과 소주가 사이좋게 어울린 자리.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함허동천이니 맞춤하게 수제천(壽齊天) 한 자락을 불러들였다. 최대치로 높인 음량의 유장한 가락에 실려 몇 가지 궁리가 흘러나왔다.

생명은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좀전에 흘린 땀이 저 바다의 소금과 같은 성분이란 것도 한 증거가 되리라. 오늘 나는 한 문장을 더 보태고 싶다. 사람이란 모두 산에서 아래로 추락한 존재들이 아닐까. 그래서 고향을 찾듯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곳으로 오르는 것. 그리하여 이런 시 한 구절에 그만 마음이 공명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백석) 어느덧 참성단에 도착했다. 말굽처럼 쌓은 제단이다. 멀리서 보니 세계수(世界樹)처럼 위용을 자랑하던 나무가 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고결한 자태이다.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있는 건 소사나무였다. 지그재그로 하늘 끝으로 뻗어가는 가지만 앙상할 뿐 잎도 열매도 없이 겨울을 견디고 있다. 이 나무 덕분에 강화는 마니산을 앞세우고 바다 바깥으로 불쑥 솟아날 수 있었다. 까마득한 시절에 이곳에서 단군이 하늘을 우르러 제사를 지냈다던가. 이제 또 세상으로 내려가야 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사나무, 자작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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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