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처럼 너무 익숙해서 딱히 자각 증세가 없을 만큼 우리 일상에 녹아든 생활 감정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빠르지 않습니다”는 선행교육 사설학원의 흔한 광고 문구다. 아무리 빨라도 빠르지 않다는 이 공황 상태는 부모에게 정상이다. ‘MADE WITH 100% PASSION’은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유니폼 등짝에 큼직하니 박힌 서비스 강령이다. 99%도 모자라 100%의 완전한 열정을 요구받는 시급 5580원의 알바에게 몰염치한 이 무례는 왕이 된 소비자에게 상식이다. 어느 대기업 그룹의 홍보 제목은 단 한 줄 “바다는 쉬는 법이 없다”는 문장이다. 쉼 자체가 부정되는 이 극한의 과로 예찬은 정규직을 갈망하는 취준생의 소망이자 생존이 목적인 월급쟁이의 기본이다.

빠른들 더 빨라야 하고 심신을 완전 연소해야 하며 휴식일랑 애초에 없는 생활이라면 식민지 노예라도 못한다. 그러나 이 불능을 가능하다고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생활세계의 내부 식민지화’다. 하버마스는 근대 시민의 생활세계(life-world)에서 비롯된 국가 관료와 시장 화폐의 체계(system)가 시민의 생활을 내부로부터 식민지화(the inner colonization)한다고 보았다. 해서 공황이 정상이고 무례가 상식이며 과로가 기본인 사회가 등장한다. 이 뒤집힌 가치를 대표하는 생활 구호가 ‘무한 리필’이다. 음식 소화부터 지구 자원까지 무한할 수 없는 한도의 제약을 무시하고 끝내 소진하는 방식으로 치닫는 생활이 어찌 가능할까.

견딜 수 있는 한 가능하다. 예컨대 환상을 좇을 때는 자신을 속여서 견딜 수 있다. 취기가 오를 때는 자신을 잊어서 견딜 수 있다. 하나 ‘부자 되세요’의 허구가 드러나고 ‘대-한민국’의 약효가 떨어진 뒤엔 어찌 견딜 수 있을까. 마냥 견디기도 한다. 독존의 아집도 탈존의 초월도 아니고 소멸되는 순간까지 잔존하는 것이다. 체념과 순응, 혐오와 연민의 쳇바퀴를 돌리는 이 잔존의 생활양식은 ‘내부 식민지화’의 궁극일 수 있다. 그럼 여기가 끝이다. 파국이 도래하는 여기에서 잉여의 전환이 시작되려면 생활세계와 체계가 각기 탈바꿈을 시도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경향신문 11월6일자 칼럼에 실린 안병진 교수의 심경과 만난다.

‘이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산뜻한 해법’이 없다는 탄식인데 누군들 떡하니 있을까. 하나 ‘어렴풋한 방향’이라며 그가 꼽은 두 가지는 잉여의 전환을 이끄는 예민한 감각이다. 하나는 ‘과거의 인식 및 태도와 급진적 단절’을 하는 것인데 국가와 시장 체계의 언어와 심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이다. 또 하나는 ‘계획적인 작은 실험을 성공’시키는 것으로 생활세계의 내 몸과 감정을 바꾸는 일이다. 이 둘은 하나다. 자신을 속이거나 잊어서 체계를 견디는 상태에서 벗어나겠다면, 그냥 견디는 잔존과 나부터 생활의 일각을 변모시키는 실천은 양자택일의 문제다. 그 어중간한 조합이 있으리라 관망하지 않고 살아 버릇하는 것은 생각의 힘일 것이다.



올 초 나온 <심미주의>(2015, 김영사)에서 문광훈 교수는 인문학 공부와 예술 경험의 목표를 ‘삶의 자기양식화(self-stylization)’라고 했다. 이를 자기제어와 변형의 자기형성술이자 삶의 기술(an art of living)로 표현한 그는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분야의 미시적 세목에 충실”하자고 주문했다. 그때가 지금이며 ‘그 미시적 세목’이 생활세계의 자발성과 공동체성의 깊이를 복원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생활세계는 국가(국민)나 도시(시민)가 아니라 우리 동네의 주민 관계를 재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실천’을 통한 ‘급진적 단절’의 열쇠가 지방분권과 마을자치 그리고 거버넌스에 있는 이유다.

그 ‘작은 실천’의 첫째는 면(面)을 늘리는 것이다. 안다, 기억한다, 친밀하다는 면식(面識)의 이웃이야말로 생활세계의 진짜 지식이다. 둘째는 정(井)을 만드는 것이다. 정도전이 인용한 맹자의 정전제(井田制)처럼 같이 파고 쓰고 지키는 공유의 우물이 많아져야 한다. 먹고 씻고 빨래하고 노래하는 ‘공유의 우물’(共井)이 살아나면 ‘사회의 형평’(公正)을 세울 법도 나올 것이다. 셋째는 생(生), 생명을 낳고 기르는 것이다. 생명을 얻으려면 사귈 시간과 사랑할 공간이 필요하다. 생명을 기르자면 돌봐줄 가족과 친구가 있고 다른 세계의 소식을 알려줄 손님이 있어야 한다.

나에겐 이 ‘작은 실험’이 견디는 힘이다. 내 생활을 마을자치의 세계와 융합하는 이 길이 어르신에겐 과거사일지 모르고 나 같은 중년에겐 뒤죽박죽 처신하는 현안이지만, 오늘의 청년에겐 아직까진 미지의 생활세계다. 마을자치를 통해 청년이 면식(face)과 공정(well)과 생명(life)의 문화를 일군다면 그 생활세계는 이미 다른 체계와 직면할 것이다. 이것이 안병진 교수의 말처럼 ‘보수 대 진보’의 퇴행적 구도가 아니라 ‘누가 더 대담하게 상상하고 누가 더 치열한가’를 경합하며 ‘과거 대 미래’의 좌표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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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