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사람마다 입을 모아/ 민주화가 잘되어간다고 그러네/ 어떻게 잘되어가느냐고/ 구체적으로 좀 말해달라고 그러면/ 하나같이 입을 열어 대답해주네// 청와대도 개방하고/ 각하란 호칭도 없애고/ 장관 임명장도 서면만으로 하고/ 국무회의 같은 것도 원탁에서 하고// … 벗이여. 닫힌 사회의 대중은 열린 사회의 대중을 모른다네/ 그들이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지배자들이 연출하는 텔레비전 속의 연극뿐이라네/ 그들이 알고 있는 자유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이 각색한 연극 대본뿐이라네.”

87년 항쟁을 거치고, 김영삼 문민정부까지를 보며 김남주 시인이 썼던 ‘연극’이라는 시의 한 부분이다. 탄핵 가결 이후 계속 생각나는 시였다. 탄핵 가결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박근혜와 청와대는 탄핵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강변하고, 친박은 다시 원내대표 선거에서 승리했다. 최순실은 혐의 내용 전부를 부인하고, 국회 청문회 출석조차 거부했다. 검찰·법원 사유화의 몸통이었던 황교안이 버젓이 제2의 박근혜로 행세한다. 각종 ‘박근혜표 정책’들을 중단 없이 이어 가겠다고 한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이제 그만 촛불을 끄고 차분하게 헌재 결정을 기다리라고 한다.

‘항쟁’ 내내 광장의 뒤편에서 정략적 사고로 헛발질만 하던 야권 역시 탄핵 가결 이후 광장의 역동성을 다시 부정하고 의심하며 재빠르게 다시 ‘질서 있는 퇴진’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간 수고들 했으니 촛불을 끄고 광장을 비우라고 한다. 의회와 기존 법 질서에 모든 걸 맡기고 다시 TV 시청자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여·야·정 협의체를 꾸려 대표적인 공범부역자 집단인 황교안 직무대행 체제와 내각을 인정하자 한다. 국정조사는 맥없이 진행되고, 가장 급선무인 ‘적폐청산 특위’를 통해 박근혜표 정책들과 악행들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갈 생각은 없이 정세의 교란 요인일 수밖에 없는 ‘개헌특위’를 만들고, 위원장을 새누리당에 주었다.

그렇다면 광장은 어떠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얼굴과 당만 바뀌는 가면극 놀이의 위선과 허위를 찢어내야 한다. 구태와 부정, 불의가 다시는 발붙일 수 없는 새로운 윤리와 가치관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향한 ‘항쟁’과 ‘혁명’은 아직 채 시작도 못했다는 긴장과 직접 행동을 유지해야 한다. 주권자들의 직접 민주주의가 검찰 법원 헌법 위의 유일한 상위법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박근혜와 비선 실세들에 대한 즉자적 분노로 열렸던 광장이, 박근혜 이후 새로운 한국사회 구성이라는 대안의 혁명으로 진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87년 항쟁의 뒤가 다시 노태우로 귀결되는 역사의 암흑이 재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결의들이 필요하다.

4·19혁명 이후의 김수영 시인은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했다.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87년 항쟁 이후 국민의정부 출범까지 보며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냐’는 김남주의 한탄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도 안되지 않겠는가.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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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