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실험을 생각해보자. 무작위로 나눈 A와 B 두 그룹의 피험자들에게 뜻이 통하도록 단어의 순서를 바꾸게 한다. 이때 A그룹의 피험자들에게는 “하루, 날씨가, 추운”처럼 돈과 무관한 중립적인 어구를 주고, B그룹의 피험자들에게는 “일, 연봉이, 높은”처럼 월급에 관련된 어구를 준다.

피험자들이 이 과제를 마치고 나면, 아주 어려운 퍼즐을 주고 풀게 한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하고 방을 나간다. 두 그룹 중 어느 그룹의 피험자들이 더 빨리, 더 많이 도움을 요청했을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중립적인 문장을 만들었던 A그룹의 피험자들은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평균 3분이 걸린 반면, ‘월급’에 관련된 문장을 만들었던 B그룹의 피험자들은 평균 5분30초가 걸렸다. ‘월급’에 대한 문장을 만드는 동안 ‘월급’을 떠올린 피험자들이 혼자 해결하려는 경향을 더 많이 보인 셈이다.

‘월급’을 떠올린 피험자들은 타인을 돕는 데도 인색했다. 이들은 문제를 푸느라 힘들어하는 다른 피험자를 도와주지도, 필통을 떨어뜨린 실험자를 도와주지도 않는 경향을 보였다. ‘월급’에 대한 생각이 피험자들을 경쟁적인 직업 현장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 점화 효과

이처럼 최근에 경험한 단어나 대상이 나중의 생각, 인식,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현상을 점화 효과(priming effect)라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은 시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바늘을 보고 나면 실을 보게 될 확률이 높고, 컵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본 다음에는 컵이 깨지는 장면을 보게 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점화 효과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인식하고 맥락에 맞게 반응하는 데 유익할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세일러 교수는 인간은 기존의 경제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성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며, 비이성적인 행동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을 연구해 왔다. 점화 효과로 인해 생겨나는 기준점(anchor) 효과는 이러한 비이성적인 행동 패턴 중 하나이다.

예컨대 주민등록번호의 마지막 2자리 숫자를 물어본 뒤, 와인병을 보여주며 몇 달러인지 추정해보라고 하면, 주민등록번호의 마지막 2자리 숫자가 큰 사람일수록 와인이 비싸다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주민등록번호의 마지막 2자리 숫자가 기준점이 되어 와인 가격의 추정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점화 효과는 건강한 식습관처럼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하도록 환경을 디자인하거나, 상품을 구매하도록 광고를 설계하는 데 쓰일 수 있다.

■ 점화 효과와 의식적인 기억

점화 효과는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행동과 인식에 영향을 준다는 측면에서 기억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기억의 내용을 의식적으로 지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식적인 기억과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기억상실증 환자와 정상인들에게 24개의 단어를 하나씩 보여주고 소리내서 읽게 한다. 몇 분 후, 학습한 단어 24개와 새로운 단어 24개를 뒤섞어서 하나씩 보여준다. 단, 간신히 읽을 수 있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만 보여주고, 보여준 단어가 무엇인지 추론하게 한다. 그 뒤 방금 추론한 단어가 앞서 학습했던 단어인지 아닌지 물어본다.

그러면 기억상실증 환자와 정상인 모두가 이미 보았던 단어를 더 잘 알아맞힌다고 한다. 미리 학습한 단어들이 점화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상실증 환자는 점화 효과에도 불구하고 이미 보았던 단어인지 아닌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에 정상인은 추론한 단어가 이미 보았던 단어인지 아닌지를 높은 확률로 기억할 수 있다. 이는 점화 효과가 의식적인 기억과 다른 과정임을 보여준다.

점화 효과와 의식적인 기억은 관련된 뇌 활동 양상도 다르다. 정상인을 대상으로 위의 단어 실험을 적용한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연구에 따르면, 아래쪽 두정엽은 점화 효과에, 위쪽 두정엽은 의식적인 기억에 더 많이 관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위의 단어 실험과 글의 처음에 설명한 ‘월급’ 실험을 할 때 일어나는 뇌 활동은 아마 다를 것이며, 점화 효과의 뇌 속 원리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 우리 주변의 점화 효과

우리는 수많은 자극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지하철 벽면의 광고, 신문 기사,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인터넷 게시물, 지나가는 사람들, 건물들…. 점화 효과는 이 자극들이 나의 생각과 인식과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나의 생각은 내 것이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주변의 영향을 받아 하게 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신년을 축하하는 1월1일에는 굳건하던 각오가 일주일만 지나면 무뎌지는 것도, 캠프나 여행지에서의 깨달음이 돌아오면 아득해지는 것도, 점화 효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점화 효과를 생각해보면 인터넷을 떠도는 유행어 하나,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지하철역의 벽보 하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기사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특정 지역이나 여성, 장애인에 대한 혐오가 공공연히 향유되는 상황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누군가에게 베푼 사소한 친절 혹은 분노의 파급효과는 어느 정도일까? 누군가가 댓글로, 공중파 뉴스로, 온라인 커뮤니티로 기획된 정보를 퍼트렸을 때, 우리의 생각과 인식과 행동은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그때 우리의 생각은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지금 나를 둘러싼 자극들은 나의 생각과 인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또 나의 말과 행동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송민령 |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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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