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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40년 전 11월이 생각납니다. 그 시절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라 부르지 않고 대학입학 예비고사(예비고사)라 불렀습니다. 대학입학 본고사 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비고사를 속어로는 그 첫음절의 로마글자를 따 ‘Y고사’라고도 불렀지요. 예비고사 성적이 대학입학에 끼치는 영향은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는 아예 없거나 매우 작았습니다. 그래도 예비고사를 치르고 나니, 한 고비는 넘겼다 싶어 마음 한구석이 조금 후련했습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은 1975년 11월의 나처럼 어떤 후련함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불안이 짙게 뒤섞여 있을 후련함을요. 대학입학 여부가 확실히 가려질 때까지 그 불안은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입니다.

서양처럼 학년도가 가을에 시작해서 대학입학 여부가 늦은 봄이나 여름에 결정된다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늦은 봄이나 여름의 싱그러움이 늦가을과 겨울의 을씨년스러움보다는 여러분 같은 입시생의 불안한 마음을 다습게 어루만져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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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개인사에서 대학입시만큼 중요한 일은 달리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나 교육은 계층이동의 경로입니다. 또는 그 반대로 계층고착의 경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처럼 결정적인 사회는 드물 것입니다. 한국은 10대 말에 특정한 방식으로 측정된 지적 성취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이 결정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 여러분이 지난주에 치른 수능의 점수입니다. 그 수능점수가 중요한 기준이 돼, 여러분은 어떤 대학에 들어가게 되거나 못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40년 전 처음 치른 예비고사가 수능과 다른 점이 거기 있습니다.



수능점수에는 여러분이 그간 쏟은 노력만이 아니라, 수능 당일의 몸 상태나 마음 상태 같은 우연적 요소도 꽤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우연적 요소보다 여러분의 수능점수에 더 많이 반영된 것은 여러분이 속한 사회계급일 것입니다. 경향적으로, 여러분이 부유한 집 출신이라면 노력에 견줘 수능점수가 높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지 못한 집 출신이라면 노력에 견줘 수능점수가 낮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만 해도 큰 불공평입니다. 소위 명문 대학들은 부유한 집 출신 학생들을 뽑을 가능성이 커지고, 이름이 덜 알려진 대학들은 부유하지 못한 집 출신 학생들을 뽑을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그런데도 한국 명문 대학들의 탐욕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시모집이라는 것을 통해서, 혹시라도 수능에서 조금 실패할 수 있을 부유한 집 출신 학생들, 또는 수학능력이 더 있다고 자신들이 판단한 학생들을 뽑습니다. 그들은 과학고나 외국어고 같은 특목고 학생들이 수능에서 조금 실패할 경우를 상정해 그 학생들을 ‘낚아챌’ 방법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정시에서조차 그렇습니다. 일부 사립대학이 수능점수나 논술성적이나 내신등급이 높은 일반고 학생들 대신에 그것들이 낮은 특목고 학생들을 뽑아 물의를 일으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목고 학생들은 대체로 부유한 집 자식들입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계급은 고스란히 상속됩니다.

그것은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프랑스 사회학자가 <재생산>이라는 책에서 세밀히 관찰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피에르 부르디외가 관찰 대상으로 삼은 프랑스만 하더라도 계급의 상속이 한국만큼 경직돼 있지는 않습니다. 교육의 대부분이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프랑스에도 소위 일류 고등교육기관들이 있습니다. 그랑드제콜이라고 부르는 이 직업학교들은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고등교육기관입니다. 이 학교들은 대학이라고 불리지는 않지만, 대학 위의 대학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그랑드제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1년에서 2년에 걸치는 준비반(프레파)을 거쳐야 합니다. 어차피 프랑스의 대학 대부분은 국립이어서 수업료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랑드제콜 학생들에게는 거기에 더해 정부가 생활비를 지급합니다. 그 대신 그들은 졸업한 뒤 일정 기간 자기 전공에 따라 공립학교 교사나 국공영 기업의 기술자, 과학자로 일해야 합니다. 그랑드제콜 출신들이 우대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학교들의 규모가 워낙 작다 보니 프랑스 사회에서 이 학교들에 못 들어갔다고 해서 패배자의 낙인이 찍히지는 않습니다. 평준화된 일반 대학을 졸업하고도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프랑스 자본주의는 한국 자본주의보다 난숙해 있지만, 학벌이 삶을 규정하는 정도는 약한 것입니다. 이것은 계급 재생산, 곧 계급 생식이 프랑스에선 한국에서보다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사립대학의 비싼 수업료로 유명한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비리그라 불리는 동부의 사립대학들이나 서부의 스탠퍼드 같은 대학엔 들어가기 어려운 만큼 졸업 뒤에 좋은 직장이 보장되기도 하지만, 주립대학을 나와도 살길이 막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립대학 중에는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분교처럼 국제적 명성을 지닌 학교도 있습니다. 하버드대학 로스쿨에서 파산법을 가르친, 저명한 상법학자이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이름 없는 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이력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상위권 몇몇 대학의 규모가 너무 커서 이 학교들을 나오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학교 출신들이 강력한 ‘벌(閥)’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학벌’이라는 말이 한국처럼 꼭 들어맞는 사회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그랑드제콜을 졸업했다는 것, 미국에서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이라는 것은 성공의 징표지만, 그 학교들의 수가 많고 정원이 워낙 적어서 그 학교들을 못 나왔다고 해 패배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상위권 몇몇 대학의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 패배의 징표가 됩니다. 그리고 이 대학들이 정원을 줄일 생각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정원을 줄인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자기 학교 출신들의 힘을, ‘학벌’의 힘을 줄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일부는 그런 명문 공룡대학에 들어가 ‘벌’에 속하게 될 테고, 다수는 거기 못 들어가 ‘벌’에서 소외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교육부가 대학입시 제도를 고쳐 이런 계급 재생산의 부작용을 줄이고자 한다지만, 그것은 헛된 일입니다. 한국 사회의 학벌 문제는 대학입시 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앞서 얘기했듯, 10대 말 특정한 방식에 따라 측정된 지적 성취가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해 버린다는 것, 그 지적 성취는 짙게 계급을 반영한다는 것, 몇몇 명문 대학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 그리고 패자부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엄격한 대학 서열이라는 한국의 제도적 위계에서 몇몇 대학이 지니고 있는 자리의 화려함은 그 대학 졸업생들 개개인의 지적 능력에 대한 사회의 판단을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오염시키며 한국의 계급지형을 더욱 고착화할 것입니다.

너무 우울한 얘기만 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 가운데 ‘공부 잘하는’ 일부에게는 신나는 얘기였을지도 모르겠군요. 내 얘기를 우울하게 들은 분들에게 큰 위안이 되지는 않겠지만, 대학이 여러분에게 부여할 초기 조건이 예측가능한 인과관계로 여러분의 삶을 결정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대학입시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거기 버금가는 여러 차례의 분기점이 있을 것입니다. 세계가 그렇듯 삶도 카오스에 가깝습니다. 중국 베이징의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면 그 다음달 미국 뉴욕에서 폭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기상현상이 초기 조건에 민감하게 의존하기 때문에 장기적 기상예측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비유입니다. 여러분이 들어갈, 또는 들어가지 못할 대학이 장기적으로 여러분의 삶을 어떤 꼴로 빚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스스로 비하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비하당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합니다. 앞으로 남은 긴 삶 속에서 늘 자존감과 명예심을 간직하기 바랍니다. 자존감이나 명예심은 자만심이나 명예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존감과 명예심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 잣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갑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입시경쟁의 패배자입니다. 게다가 예비고사를 세 차례나 봤습니다. 그러나 자존감과 명예심을 버리지 않으려고 늘 애써 왔습니다. 그 노력은 내 삶을 그럭저럭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며칠은 푹 쉬십시오. 대학입시까지 앞으로 남은 절차가 있겠지만, 여러분에게는 쉴 자격이 있습니다. 모두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바란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간 고생 많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제몫의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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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