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경향시선

연필을 깎을 땐

숲이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린다

촛불만 봐도

아이 현란해, 방으로 들어가는

촌스러운 아가씨를

밤은 쓰다듬어 준다

달까지 가지를 뻗는 나무

그것은 구름의 다른 말

하얀 나무를 볼 때면

하늘에도 숲이 있다고 믿었다

눈이 쌓인 당신의 방 앞

마당에 세워 둔 그릇 가득

눈이 쌓일 때

나의 따뜻한 여인아

바쳐 드릴게요 이젠 잊고, 마시오

서로를 외롭게 바라보고

그리워도 연필을 깎지 말고

아이들과 누워

작고 희귀한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연필을 깎을 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해 주시오

 -성동혁(1985~ )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나의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보낸 러브레터’라는 주석이 붙어 있는 연애시다. 연필 깎을 때 나무의 생살을 깎는 느낌, 칼로 맨살에 상처를 내는 느낌, 그래서 문명이 한 번도 범한 적 없는 자연의 처녀성을 짓밟는 느낌. 그 느낌이 연필에서 “숲이 슬피 우는 소리”를 끌고 온다. 연필 하나 깎는 데도 생명을 해치는 것 같은 연민과 슬픔 없이, 촛불만 봐도 순수한 밤의 처녀성이 훼손되는 것 같은 아픔 없이, 어떻게 한 여자를, 순결한 자연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성동혁 시인은, 연필 깎을 때, 몸 어딘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생살이 잘려나가는 것 같을 때, 온몸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생명 사랑의 시학을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나 보다. 그 감성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듯 시 쓰는 법을 익혔나 보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시적 감성과 연애의 감정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게 아닐까. 들리지 않는 자연의 깊은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재능은 멸치 하나 먹는 것조차 죄스러운 도덕적 감성에서 나온 게 아닐까.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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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