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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인지라 지루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을 양해하시기를. 그건 자유민주주의라는 사생아적 개념과 관련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생아적 개념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질적으로 상이한 원리들이 야합해서 탄생한 개념이니, 분명 자유민주주의는 사생아적 개념이다. 먼저 이 사생아를 낳은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 순서겠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긍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소비의 자유를 긍정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돈을 가진 자가 자기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다는 원리가 바로 자유주의이다. 결국 돈이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커다란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진정한 주체가 사람이라기보다는 자본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주주총회를 예로 생각해보자. 한 사람이 50만주의 주식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 49만명이 각각 1주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주주총회는 50만주의 주식을 가진 이 한 사람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질 수밖에 없다. 분명 과반수의 원칙은 적용되기는 하지만, 그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다. 민주주의에서도 과반수의 의지에 따라 적용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체는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다. 대표자를 뽑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준다. 앞에서 주주총회를 좌지우지했던 그 한 사람은 선거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소액 주식을 가지고 있던 나머지 49만명이 선거에서 결정적인 힘을 행사할 테니까 말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사생아적인 것이다. 자유주의라는 원리를 통해 자본의 전능성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라는 원리를 통해 인간의 전능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관철하려면 기묘한 역설이 하나 발생한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면 그 누구도 대통령 등 대표자로 선출되기 어렵다. 소수 자본가의 자유를 긍정한다고 선언한 입후보자가 있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를 대표자로 뽑을 수 있겠는가. 반대로 대표자가 된 다음에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면 그 누구도 대통령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다. 대통령을 포함한 국가기구는 세금으로 작동하는 조직이니, 국가기구는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는 소수의 자본가를 편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는 것은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약 잊은 청와대 (경향DB)

 

뒷간에 갈 적 마음이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는 속담이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속담이 또 있을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 노릇은 더럽게 힘든 일이다. 민주주의라는 원리에 따라 대통령이 되었지만, 자유주의 원리에 따라 대통령 노릇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벗고 자유주의라는 가면을 새로 쓸 때, 정상적인 인격의 소유자라면 고민이라도 하기 마련이다. 아니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자본가 계층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다수의 국민들에게 나누어줄까 고심하고 고뇌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될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압력에 나름대로 성실하게 저항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가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대통령과 정부는 오직 두 종류만 가능한 셈이다. 선거 때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대통령과 정부, 아니면 선거 때의 초심이야 아마추어와 같은 것이라며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리는 대통령과 정부, 그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는 후자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편적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모토로 제안되었던 화끈하고 실질적인 공약(公約)들을 하나둘 허공 속에 날리며, 세계사적으로 실패로 귀결되었던 자유주의 정책을 때늦게 관철시키려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의료, 교육, 철도, 금융까지 그 적용 범위도 폭넓고 그 시행도 동시다발적이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당연히 자유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저항은 불가피할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초심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치거나
초심이야 아마추어 같은 것이라며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리는…
오직 두 종류 대통령만 가능한 셈”

민영화를 하지 않겠다는 공약(公約)의 부담 때문인지, 박근혜 정부에서 ‘민영화’라는 용어는 금기어가 된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용어만 쓰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식으로 정부는 아주 강하고 집요하게 자유주의 정책을 구체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철도 부문에서 코레일 내에 자회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고, 의료 부문에서 의료자본에 원격진료와 영리사업을 허용하려고 하며, 금융이나 교육 분야에서 외국 자본이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을 제대로 만들어주려고 한다. 물론 ‘민영화’라는 금기어 대신 정부는 ‘혁신’ ‘경쟁’ ‘소비자의 선택권’ ‘부가가치 창출’ 등등의 단어를 사용하기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런 미사여구만으로도 얼마나 박근혜 정부가 자유주의 이념에 편향되어있는지 우리는 충분히 직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지겹게 들어왔던 용어들이 다시 등장하는 걸 보고 아연실색하는 것은 오직 나뿐일까. 이 모든 용어들은 자본의 자유, 혹은 자유주의를 위해 바쳐진 장미꽃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장미꽃의 향기에 취한 결과 우리는 1997년 이후 지금까지 15년 넘게 민주주의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묵과해왔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의 참담한 현실에 던져진 것 아닌가. 자본의 자유를 허용한 결과, 우리는 이제 공동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삶의 질이 하락해버린 환경에 살게 된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부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밑도 끝도 없는 궁핍으로 내던져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대통령, 그걸 확고하게 실천할 수 있는 대통령을 뽑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것 아닌가.

민영화인가 아니면 민영화가 아닌가? 이건 쟁점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박근혜 정부가 이미 파산 선고가 내려진 때늦은 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점, 박근혜 대통령이 이미 죽은 영국의 대처 총리를 따라 ‘철의 여성’이란 코스프레를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코레일 내부에 수서발 KTX라는 자회사를 설립해서 혁신과 경쟁을 도모하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정책이다. 외국이나 국내의 거대 의료자본에 유리한 진료방법이나 영리사업을 허용하는 것도 모두 자유주의 정책이다. 우리 공동체를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지금 정부는 추진 중인 것이다. 자유주의의 전횡을 계속 묵과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진정한 쟁점이다. 도대체 얼마나 부익부빈익빈의 바닥에 이르러야, 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너무나 바닥에 내려가서 이제 올라갈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인가? 모를 일이다.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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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