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의 최전선을 다루는 패션잡지에서 일하며 아이템이 떨어질 때마다 마치 구세주를 찾듯 종종 찾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마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으로 업계에서는 선수권대회에 나가도 좋을 만큼 ‘촉’이 빠르고 ‘입담’마저 ‘메달감’으로 통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이었다. 패션 피플 1세대답게 그의 정치적 성향은 사뭇 ‘조선일보’스러운 데가 있었고 잘 모르고 보면 그냥 ‘잘 늙지 않는 날라리’ 분위기였지만 내가 아는 그는 보기보다 훨씬 더 지성적인 동시에 인간적으로 순수하고 깊이라든가 진정성마저 있는 사람이라 나는 그를 기꺼이 ‘선생’으로 생각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LP판. 중고 판매 사이트 갈무리

그런 그가 몇 해 전에 매우 신선한 ‘새해 결심’을 했던 걸로 안다. 내가 패션지 기자 신분으로 맞은 거의 마지막 새해였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만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친구 최시영이랑 ‘새해부터는 아날로그를 하자’고 다짐했어. 그래서 새해 첫날 아침부터 의자 위에 눌어붙어서 그동안 못 들었던 LP를 실컷 들었다니까. 그중 가장 좋았던 게 마일스 데이비스의 <Bags Groove>였는데 그걸 듣고 있으니까 너무 좋아서 심지어 눈물이 나는 거야. 어느새 나도 속절없이 늙어버렸지만 내 앞에 이렇게 느긋한 방식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들이 점점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하니 늙는 게 나쁘지 않게 느껴지더라고. 그러다 죽어도 괜찮을 것 같고.”

생각해 보니 내게 이른바 ‘차 한 잔으로 부릴 수 있는 여백의 힘’을 알려준 것도 마선생이었다. 자동판매기에서 인스턴트 커피 나오는 시간도 지루해 좀이 쑤시는 종류의 인간이 바로 나였는데 그런 내가 어느 순간부터 잎녹차를 우려 마시고 있었다.

“난 말이야. 우리가 고요히 기다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도 직접 차를 우려 마셔야 한다고 생각해. 특히 이렇게 미친 듯이 바쁘게 사는 우리한텐 그런 게 꼭 필요해. 예컨대 티백이나 가루녹차 같은 것 말고 잎녹차를 끓여 마신다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거잖아. 그리고 그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과정을 통해 결국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거고.” 그의 얘기는 그것이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순간’이기에 기꺼이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하고 마음에 드는 다완도 사고 기분 좋고 바스락거리는 좋은 찻잎도 사고 물도 끓이고 차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았다.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의 온갖 화려하고 세련된 곳들 있잖니. 그런 곳들에 내가 손댄 곳이 많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 중심에 있어 보았기 때문에 아는 거지. 그 중심에 있는, 그런 기분 같은 것의 공허함이랄까 뭐 그런 것들을. 그래서 나는 이제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일들,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아. 오히려 손으로 만져서 그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일들, 그래서 요즘 공예라든가 핸드메이드라든가 하는 보다 아날로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돼. 그게 직접적인 교류의 문제인 거잖니? 크건 작건 상관없이 일일이 내 손으로 직접 만져서 더 밀접해지고,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게 중요하단 생각이 들어.”

이제와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얼마나 놀랍도록 촉이 빠른 동시에 본질을 꿰뚫는 진실된 얘기가 아닌가 싶다.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하나둘 사라지다가 결국 공룡처럼 멸종하고 말 거라고 예상하던 소규모 동네서점이나 음반가게들이 다시 문을 열고 있다는 희소식을 전할 줄이야. 얼마나 가슴 뛰는 멋진 트렌드인가 싶다. 온 세상 음악을 클릭 한 번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음악을 손으로 고르고 구매하는 육체적 즐거움에 눈뜬 젊은이들이 새삼 비닐 레코드이거나 CD, 심지어 카세트테이프로 된 음반을 기꺼이 구매하고 있다는 뉴스를 전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줄이야. 야호!

아마존이 뉴욕 맨해튼에 오프라인 서점을 열었다는 소식이 먼저였지만 그보다 더 반가웠던 건 내 대학시절의 우상이었던 최인아 카피라이터가 강남에 동네서점을 열었다는 소식이었다. 기쁜 마음에 그 최인아 서점에 갔다가 발견한 책 <아날로그의 반격>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디지털에 둘러싸인 우리는 이제 좀 더 촉각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경험을 갈망한다. 우리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제품이나 서비스와 소통하기를 원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위해 기꺼이 웃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그리하여 세계는 지금 비트코인 광풍에 휩싸여 다양한 연령대의 폐인들을 양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새해엔 아날로그를 하자’고 결심하는 이들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후자다. 이미 수고롭게도 LP는 물론 CD와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고 동네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며 날이면 날마다 핸드드립 커피와 잎녹차를 마시고 있는 나는 새해엔 더 아날로그적인 인간이 되자 결심하며 다시금 필름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암실에서 현상하는 육체적 즐거움까지 누려볼 수 있을까 상상도 해 본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오감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육체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사실상 누구나 다 아날로그다. 그 사실이 난 기쁘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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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