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회원으로 참여하는 단체에서 대중강좌를 기획하는 회의가 있었다. 주제를 ‘양심의 자유’로 정하고 전문가 A박사를 섭외하기로 했는데, 회원 두 명이 이견을 냈다. 한 사람은 요즘 수강생들이 양심의 자유에 관심이 있겠느냐며 강의 주제에 회의적이었고, 다른 사람은 A씨를 개인적으로 아는데 “양심이 없는 분”이라며 반대했다. 참석한 사람들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이 에피소드가 지금 한국 사회의 중요한 단면이라고 생각했다.

양심의 자유(freedom of conscience)는 개인이 추구하는 신념이나 가치관에 대해 외부 세력(주로 국가)의 억압이나 강요가 없어야 한다는 대표적인 인권 사상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주로 “사상의 자유”라고 표현하지만 서구에서는 근대 초기 르네상스 때 종교의 자유에 대한 사회운동으로 출발했기에 신앙의 자유의 의미가 강하다.

그간 우리 현대사를 지배해온 일제와 미국에 기댄 군사독재 세력은 사상의 자유를 철저히 탄압해왔고 수많은 정치범과 양심수(良心囚)를 양산해왔다. 대한민국은 한 인간을 45년 동안(1951~1996) 감금한 기록을 갖고 있는 국가다.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만델라도 27년이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양심의 자유는 주로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 국가(정권)는 위기에 몰리면 엉뚱한 ‘종북몰이’를 할망정,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애초부터 “단일한 국가의 이익”은 이데올로기일 뿐 실제로는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어쨌든 요즘은 국가의 이익에 반대하는 사상을 깊이 연마하고 주장하는 개인도 별로 없다.

요약하면, 예전에는 양심의 자유가 공적영역에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주장됐다면 지금은 ‘양심의 자유’보다 개인들 간의 ‘양심의 의무’가 절실한 시대다. 악화가 양화를 쫓아내던 시대조차 한참 지났고, 양화는 어딘가에 숨어 분통과 우울 속에서 지내는 것 같다. 우리는 양심은커녕 상식도 공유되지 않는 시대를 견뎌내고 있다. ‘양심 없는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기(詐欺)와 횡령(橫領)이다. 이 말은 법률 용어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타인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는 모든 행동을 의미한다. 

근래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형식의 양심 종말(?)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장단점 차원에서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장단점은 결국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는 관념론이다(“악용하지 말자!”). 그보다는 SNS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 사회의 진보, 보수는 너나없이 발전주의자들이다. 이들 모두 IT나 스마트폰의 진화에 열광한다. 성장주의와 민주주의는 상극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SNS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SNS는 날마다 갖가지 기록을 경신하는 극단의 자본주의 체제에 범퍼(안전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시간 보내기, 현실도피, 자기만의 세계를 충족시키는 장난감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 

둘째, SNS는 기존의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온라인은 가상세계고 오프라인은 현실이 아니라 모두가 현실이다. 진짜 현실도 SNS도 다양한 현실들의 하나다. 이 때문에 SNS의 헤비 유저들은 현실세계의 ‘루저’가 아니라 다른 현실의 국민이요, 주체다. 이들은 여러 개의 아이디(시민권)와 익명성, 연결망으로 다른 현실의 ‘주류’를 공격한다. 이들 중 일부는 키보드 노동으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혐오 산업을 생산한다. 유명 인사를 괴롭힘으로써 자아를 고양한다(‘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같은 사이트가 대표적일 것이다). 키보드만으로 자아실현이 가능한 시대다. 

가장 큰 문제는 SNS의 자아가 또 하나의 자아가 아니라 아예 ‘동명이인’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페이스북을 운영하는 사람과 페이스북에 재현되는 사람이 완전히 다른 경우가 많다. 여기서 사기가 발생한다. 온라인상의 욕설이나 여성에 대한 혐오도 문제지만, 이는 새삼스럽지 않다. ‘일베’는 새로운 미디어가 곧 권력이라는 것, 즉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임을 잘 보여준다. 오프라인에서는 그런 언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자기 홍보는 규제가 없다. 페이스북에는 ‘헌신적인 사회운동가’ ‘올바른 페미니스트’ ‘억압받는 소수자 대표’ ‘미모의 개념녀’가 넘쳐난다. 개인의 일상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자기도취와 관음증, 노출증을 전제한다. SNS에 자기소개를 나쁘게 하는 사람은 없다. 예전에는 국가가 여론을 조작했지만, 지금은 개인이 방송국을 운영하고 여론을 만든다. SNS를 통해 개인의 능력과 이미지를 과잉 재현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다. SNS의 ‘이미지’로만 사회적 영향력을 갖거나 거짓 모금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팔로어 숫자에 의해 좌우되고 그들의 환심을 얻으려면 일상을 접고 온라인상에서 세력 확보에 사력을 다해야 한다. 실제 삶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양심의 자유는 부정의한 권력에 저항할 때 필요한 권리이고, 양심의 의무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필요한 윤리다. 후자에 기반을 둔 전자의 실천은 도인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매체의 발달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다. 기술의 한계보다 양심의 한계가 더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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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