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내린 너른 물에 황금 빛깔 넘실대고 바람 치는 봉우리엔 푸른 옥이 흩뿌리네. 서호를 서시에 견줄 만하구나. 강산이 끄는 흥취를 어이하리오.” 서거정이 양화나루에 배 띄우고 지은 시이다. 햇살에 빛나는 강물과 빗방울 날리는 봉우리가 펼쳐진 풍경을 멋지게 묘사했다. 서호를 춘추시대 미녀 서시(西施)에 견준 이는 소동파다. 서호의 경치를 즐기며 종일 술자리를 이어가는데, 그렇게 맑던 날이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며 비가 쏟아진다. 좌중의 흥취가 깨지려는 때 소동파는 시를 읊는다. “맑은 날엔 물빛 넘실거려 아름답고, 비 오는 산의 뿌연 어둠도 장관이네. 서호를 서시에 견주어 보자면, 옅은 화장 짙은 화장 어느 때고 좋도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모처럼의 연휴, 제주도에 다녀왔다. 첫날 맑디맑은 하늘 아래 본 제주의 풍광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그러나 둘째 날은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창밖을 보며 실망과 걱정에 싸여 있을 때, 일행 중 한 분이 “오늘 같은 날 위로가 되는 시입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소동파의 이 시를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찾아간 큰엉 해안. 세찬 폭우를 맞으며 바라본 바다는 화장 전혀 안 한 서시의 성난 얼굴 같았지만, 그 역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어느 때고 좋도다”로 번역한 소동파 시의 마지막 구절 “총상의(總相宜)”는 특정한 조건에만 적절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그것대로 적절하다는 뜻이다. 늘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다. 좋은 날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궂은 날 거기에 맞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만들기란 쉽지 않다. 넉넉한 마음과 매인 데 없는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첫머리에 인용한 서거정의 시는 음풍농월에 그치지 않는다. 1476년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로서 정사 기순(祁順)의 시에 화운한 작품이다. 자연을 읊기는 했지만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긴장 속에 지은 것이다. 변화가 시작된 남북관계에 맑은 날만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위태롭더라도 가야만 하는 길, 살얼음을 밟듯 외줄을 타듯 조심스럽게 균형 잡으며 우선 가능한 분야의 교류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야 할 것이다. 고착화된 관념과 제도들을 내려놓고 사안마다 거기에 맞는 적절함을 찾아가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일반 칼럼 > 송혁기의 책상물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거, 말들의 향연  (0) 2018.06.07
숙려에 대한 우려  (0) 2018.05.23
어느 때고 좋도다  (0) 2018.05.09
질문의 힘  (0) 2018.04.25
자리가 사람을 만들까  (0) 2018.04.11
불행을 견디는 힘  (0) 2018.03.28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