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천당 가자!”는 것도, “사는 동안 복 받자!”는 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다만, 경(經)자가 붙은 책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지금 당장 살아야 하는 천국이어야 하고, 복이란 것도 저만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하는 동고동락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천당이니 복이니 하는 말은 되도록 가려서 하는 게 좋다. 만일 죽은 아이들은 천당 갔으니 됐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넉넉하게 보상받았으니 됐잖은가 하는 따위의 실없는 말을 쏟았다면 크게 뉘우쳐야 한다. 벌 받을 소리다. 그만 잊자, 하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억하라, 그리고 행동하라!”(루카복음 22:19)고 명령했다. 자신의 죽음을 잊지도, 가만히 있지도 말라고 했던 것이다.

이 말씀이 불씨가 되어 제자들은 줄곧 뜨거웠고 거듭 시대와 충돌했다. 법정에 불려가고 형무소에 갇히고 얻어터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엉뚱한 소리로 시끄럽게 하지 말고, 쓸데없는 짓으로 심란하게도 하지 말라! 이것이 말문 막고 손발 묶으려는 권력자들의 습성이다. 반면 우리가 지지리 못났어도 잊을 수는 없다. 등신처럼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은 민중의 근성이다.

억압하려 드는 습성과 억눌리지 않으려는 근성이 맞잡이를 벌이는 게 성경의 역사다. 신약성경에 이런 대목이 있다. “여러분은 예수를 죽였으나 하느님은 살리셨소.”(사도행전 4:10) 예수를 죽인 너희는 틀렸고, 하느님이 살려낸 예수가 옳았다는 거센 항변이다. 그러자 살인자들이 움찔해서 말했다.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 와서 어쩌려는 것이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소. 이제 그만 잊읍시다. 하지만 제자들은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지 사람의 말을 들어야 되겠소?”(사도행전 4:19)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살을 찢고 뼈를 분질러버리며 망각과 부동자세를 명했지만 그들은 천하태평이었다. “하느님께 복종해야지 사람에게 복종해서야 쓰겠는가?”(사도행전 5:30)라면서 눙쳤던 것이다. 이렇게 담력으로 폭력을 확 무너뜨리는 일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세월호 참사 31일째인 16일 노란 종이배가 놓여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 바람이 불고 있다._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허균의 호민론을 떠올려보자. 천하에 두려워할 것은 오직 백성뿐. 홍수나 화재, 호랑이나 표범보다 더 무서운 게 백성인데 어째서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함부로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어도 아무 탈이 없는가. 세 부류의 백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 제 눈앞의 이익에만 마음을 쓸 뿐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 항민(恒民)이라 하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은 무력한 자들이다.

둘째, 살이 벗겨지다시피 빼앗기고 뼛골이 부서지도록 얻어맞는 현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원민(怨民)이라 부르는데 역사를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다.

셋째, 몸을 낮추고 마음을 감추면서 천지간을 흘겨보다가 때가 닥치면 자기 꿈을 펼치고자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를 호민(豪民)이라 한다. 무릇 호민이야말로 반드시 두려워해야 할 자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호민은 무엇으로 호민이 되는가. 두말할 것 없이 기억과 행동이다. 그래서 예수의 최종유훈도 그와 같았던 게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2주기. 자식 잃고 통곡하는 부모들이 732일째 ‘4월16일’을 맞이하고 있다. 날마다 찢어지고 무너지는 그 마음을 누가 알까.

“강촌에 밤이 들어 물결이 적막한데… 딸의 비석을 찾아가서 울음 운다. ‘아이고 내 딸 심청아, 인간 부모 잘못 만나 생죽음을 당했구나. 네 애비를 생각하거든 나를 어서 데려가거라. 살기도 나는 귀찮고 눈 뜨기도 나는 싫다.’ 가슴을 두드리며 머리도 지끈, 발을 굴러 미친 듯 취한 듯, 실성 발광하며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구나.”(심청가)

심학규, 그래도 그는 행복한 아버지였다. 날마다 추락하는 끔찍한 세월이었지만 끝에 가서는 “내가 이리 물을 무서워하는 것은 부친에 대한 정이 부족함이라!”면서 몸을 던졌던 딸을 만나 어루만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날’이 다시 왔지만 소리 내서 엉엉 울지도 못할 분들께도 그런 날이 온다면 오죽 좋을까. 그렇다고 통곡의 절벽 앞에 서 있는 부모들을 안타깝게만 여기지 마시라. 그들은 아직 자식을 찾기도 전에 세상에 눈을 뜬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행동이라는 이성의 과업에 이토록 성실하고 용감했던 사람들은 일찍이 드물었다. <심청전>은 심 봉사 눈 뜨는 소리에 전국의 모든 맹인이 동시에 눈 떴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사흘 뒤는 호민들이 탄생하던 천지개벽의 그날, 4·19혁명일이다. 축하드린다! 이 봄날, 우리가 눈을 뜨게 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심청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들, 그분들 덕이라고 믿는다.


김인국 | 청주 성모성심성당 주임신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