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현기증은 봄으로 달래는 게 옳겠다. 여러 봄소식 중에서도 꽃이 제일이지 않을까 싶어 남해를 찾았다. 지난여름 땡볕의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바다와 직접 면한 고장들 중에서도 특히 따뜻하기로 이름났다 해서 운동선수들의 겨울훈련지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씩씩한 함성에 놀라 바삐 뛰어나온 꽃이 있을까. 하지만 그런 요행은 늘 비켜가기 마련이다. 망운산 중턱에 있는 노구 저수지의 뒷사면을 뒤졌지만 이렇다 할 꽃은 기미조차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낙엽을 들추고 흙을 조금 파보니 땅은 아직 얼음으로 죄 딱딱했다.

허전하게 임도로 나오는데 나이 지긋한 분이 경운기를 세워놓고 대나무를 자르고 있다. 남해요? 좋다말다요. 물이나 땅에서 파기만 하면 뭐라도 나와요. 꽃? 하이고, 아직 정월인데 아직 멀었지요. 바다에서 고기를 낚을 건 아니었고 밭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데 쓰일 대나무. 나이테 대신 구멍이 뻥뻥 뚫린 대나무의 텅 빈 속을 보며 지나치는데 길 가까이에 또 다른 구멍이 있었다. 딱따구리의 작품인 듯 여덟 개나 되는 오동나무의 구멍이었다. 사실 오동나무를 오늘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산에서 가끔 보되 주로 무덤가에서 만났던 나무였다. 얼굴을 가리고도 남을 큼지막한 잎은 지하로 녹아들고 없었지만 눈알만 한 열매가 아직도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공중에 세로로 뚫린 구멍들을 보는데 한 궁리가 주르륵 엮어졌다. 오동 한 잎 떨어지는 소리가 천하에 가을을 알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오동나무는 소리하고 깊은 관련이 있다. 이뿐인가. 여러 국악기의 공명판으로 안성맞춤인 오동나무이다. ‘이그(Ig)노벨상’에 따르면 딱따구리의 머리는 머리뼈와 부리 사이에 스펀지 같은 완충조직이 있어서 뇌진탕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새는 구멍을 뚫을 때부터 헤드뱅잉으로 경쾌한 음악을 숲에 들려주는 것. 그리고 지금은 바람이 세게 불면 오동나무에서 희미한 피리소리가 울려나올 것 같았다. 나중 죽어선 거문고나 가야금이겠고 살아선 여덟 구멍으로 허공을 연주하는 오동나무. 현삼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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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