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한 걸음에 한 문장이다. 네모의 빌딩과 네모난 유리창, 비슷한 메뉴에 비슷한 얼굴들, 전망이 온통 광고뿐인 도시에서야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랴. 하지만 산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한 발짝 옮길 때마다 나무에서 나무로, 그 나무들 아래에서 전혀 다른 꽃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생각은 휘발유 같다. 기록해 두지 않으면 재빠르게 도망가 버린다. 지금 눈앞에 핀 꽃들은 작년에 떠나간 내 생각들이 아닐까.

가평 명지산 한 골짜기를 훑고 내려가는 길. 달아나는 생각이 그물에라도 걸린 것처럼 가뭇한 공중에 싱싱한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촘촘하다. 지난겨울에 흩날린 진눈깨비 몇 점 아직도 남았는가, 했더니 사위질빵의 씨앗들이다. 북실북실한 털이 햇살에 반사되어 하얀 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4월이라고 눈이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이 깊은 산골에는 계절도 느리게 가고 오는 법이다. 짙은 응달의 어느 구석에서는 최후의 얼음이 패잔병처럼 남아 있기도 하다. 공중을 비집고 나오는 찬 기운에 마음이 속았나 보다. 이번에는 정말로 펄펄펄 내리는 흰 눈인가 했더니 올괴불나무의 꽃들이다. 향기가 진동하여 나그네의 빌길을 막아섰다는 길마가지나무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아취를 풍기는 꽃, 올괴불나무.

산길을 더욱 천천히 내려가는데 노란 꽃이 펄럭거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꽃이 아니라 리본이었다. 등산팀들이 흔히 갈림길에 달아놓는 꼬리표였다. ‘산에 사네.’ 무심코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 말이 이상하게 입안에 자꾸 맴돌았다. 생강나무의 꽃에 일부러 색상을 맞춘 듯 노란 천에 쓴 글씨. ‘산에 사네.’ 산이라는 명사와 산다라는 동사가 이렇게 딱 어울리는 조합일 줄이야 예전에 미처 몰랐었네. 물소리가 졸졸졸 흐르는 것을 보면서 돌은 자음, 물은 모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이 또한 서로 착 호응하는 문장이 아닐 수 없겠다. 빨랫줄에 천사들의 속눈썹이 떨어져 걸린 듯한 올괴불나무 앞을 지나치며 자꾸자꾸 중얼거려 보았다. 산에 사네, 산에 사네, 산에 사네. 올괴불나무, 인동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일반 칼럼 > 이굴기의 꽃산 꽃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우난초  (0) 2017.05.16
야광나무  (0) 2017.05.10
올괴불나무  (0) 2017.05.02
조개나물  (0) 2017.04.25
고깔제비꽃  (0) 2017.04.18
금괭이눈  (0) 2017.04.1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