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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현인을 통틀어 여성을 시중들게 한 게 아니라 제자로 삼은 사람은 예수가 유일했다. 예수의 여성 제자들은 여러 면에서 남성 제자들을 압도했다. 최후까지 예수와 함께한 것도 여성 제자들이었다. 예수가 체포되자 남성 제자들은 모두 배신하거나 도망쳐버렸다.

그러나 여성 제자들은 정치적 반란범의 동조자로 몰려 죽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더 충직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생각을 더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남성 제자들이 배신하거나 도망친 주요한 이유 역시 예수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무덤에서 주검이 사라진 걸 발견한 것도 여성 제자들이었고, 부활한 예수가 처음 만난 사람들도 여성 제자들이다.

복음서에는 이런 사실들이 대체로 기록되어 있다. 제자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로 말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여성 제자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도마복음을 비롯한 정경 밖 성서에는 마리아가 예수의 가장 신뢰하는 제자이자 가장 긴밀한 동지였음을 드러내는 대목, 남성 제자들이 그걸 시기하는 대목이 많다. 예수가 떠나고 예수를 기억하는 공동체가 가부장적 종교로 발전하면서, 베드로와 남성 제자들이 권력을 갖는 대신 여성 제자들은 철저히 제거된다. 남성 제자들이 눈엣가시이던 막달라 마리아를 제거하는 방법은 교활하면서도 손쉬웠다. 그가 ‘창녀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성서 어디에도 근거가 없음에도 기독교 전통에서 마리아는 내내 창녀였다. 로마 가톨릭이 마리아를 ‘사도 중의 사도’라 인정한 건 1988년이다. 예수의 생모 마리아가 동정녀여야만 했던 이유와 최고의 제자 마리아가 창녀여야만 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같다.

예수는 대중 앞에서 이야기할 때 언제나 ‘비유’ 형식을 사용했다. 비유의 소재는 모두 인민의 노동과 일상에서 가져왔다. 그래서 남의 노동 덕에 살아가는 유한계급과 책과 관념으로 지식을 쌓은 사람보다는 제 몸으로 노동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훨씬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민들은 대부분 글을 몰랐다. 예수의 언어 속에서 교육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으로 대변되는 계급 질서는 전복된다. 비유의 소재 가운데는 특히 가사노동과 살림에 관한 게 많았다. 예수의 언어 속에서 계급 질서는 한번 더 전복된다. 예수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 그중에서도 여성이었다.

우리는 예수를 일컬어 성평등 의식이 높은 사람이었다, 페미니스트 혹은 우머니스트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군중의 수를 표현하는 대목엔 ‘사람들 가운데 남자가 몇명’이라는 표현 대신 ‘사람이 몇명’이라는 표현이 빈번하다. 당시 사람들에게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남성)을 섬기고 보조하는 ‘존재 없는 존재’였다. 여성이 남성과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의식이 존재할 때, 예수의 행동이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그런 사고 틀 자체가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행동은 존중할 것도 비판할 것도 없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 뿐이었다.

여성 문제의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거의 첫 세대에 가깝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는 우리와 동세대의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예수 당시 사람들의 시간에 머문다.

우리는 분명히 모두 2016년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모두 2016년을 살아가지 않는다. 누군가는 1916년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서기 16년을 또 다른 누군가는 516년을 살아간다. 일부만이 2016년을 살아간다. 성폭행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귀가 시간을 문제 삼는 사람은 결코 2016년을 살아가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를 말할 때 ‘순결한 소녀’ 이미지에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2016년을 살아가지 않는다.

물론 이건 여성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를 ‘단지 안전사고일 뿐’이라 말하는 사람과 ‘19세/컵라면’ 서사에 빠져드는 사람과 사고의 근본 원인과 구조를 고민하며 그 구조 속의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은 결코 같은 시간을 살아가지 않는다.

세계의 고통은 바로 그런 차이에서 발생한다.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동일한 시간을 동일한 자격으로 살아간다고 전제하는 근대적 가설이, 무수한 충돌과 통증과 누적되는 피로감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종종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듯한 절망감과 무력감에 빠져드는 건 버젓이 과거를 살아가는 유령들 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 늘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시간은 실은 여러 개이며 불균등하다. 적어도 그 일부에서 나는 과거의 유령일 수 있다. 나는 여성 문제의 맥락에서 2016년 즈음을, 노동 문제의 맥락에선 1816년을 살아갈 수 있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인정하고 실존적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시간을 앞서 살아가며 우리를 일깨우는 사람들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물론 그들은 대개의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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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