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새파란 귀때기를 두 손으로 감싸고서 밀밭과 까마귀가 있는 동네 어귀를 내달렸다. 여름엔 사이프러스나 올리브나무가 자랄 것같이 따뜻한 남프랑스 어디 같은데 겨울 되면 백팔십도 달라져서 파타고니아, 우수아이아 어디 빙하마을 같아. 거미줄처럼 내리는 차가운 빗물과 밤사이 서릿발. 구름이 새까맣게 얼룩진 날엔 눈보라가 들이치기도 할 것이리라. 김치 치즈 하면서 웃고 서 있는 건 자작나무뿐. ‘갈봄 여름 없이 산에는 꽃이 피네’ 그랬다면 이젠 눈꽃이 피어날 차례.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자 흰 산토끼는 자작나무 말고는 어디 마땅히 숨을 곳을 못 찾은 모양이다. 산길에 허둥대는 토끼를 만났는데 실눈을 뜨고 못 본 척해주었다. 토끼는 씰룩 기운을 모은 뒤에 다시 비탈길을 뛰어 달렸다. 버스를 놓칠까봐 뛰어가는 아이처럼 잽싸고 날래게. 누군가 그토록 원했던 ‘우주의 기운’을 아마도 토끼가 저 혼자 차지해버린 걸까. 조그만 몸에서 무슨 기운이 저렇게 펄펄 나는 거람.

“내가 기운 없어 보일 때는 기운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기운을 내지 않는 거라고 나는 옆에 있는 사람한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낼 필요가 있을 때는 무슨 기운이든 기운을 냈다) 듣는 사람은 의아해했으나 정령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호랑이들도 만족스러워했다.” 정현종 시인의 ‘기운’이란 시다. 정말 맞는 말씀이다. 기운은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 세계테마 어쩌고에서 나를 봤다며 동네 부녀회장님이 그랬다. “세계적으로다가 돌아댕기시는 양반입디다잉. 퇴깽이(토끼)보다 겁나게 깔끄막(산고개)도 잘 올라타시등만.” 호랑이도 있고 뭣도 있고 하는데 하필 토끼가 뭐람. 막걸리 포도주에 눈이 빨개 살아가니 그러셨나. 그래 우주의 기운까지는 무리이고 새해 기운이나마 받아 누려야 할 시간. 산토끼가 힘차게 달려가는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우리 모두 토끼의 뒷다리처럼 야물딱진 뜀박질로, 기운을 내서 살아가자. 기운은 내야 하는 것이다.

임의진 목사·시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임의진의 시골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랙리스트  (0) 2017.01.19
구둣발차기  (0) 2017.01.12
우주의 기운  (0) 2017.01.05
육식에서 채식으로  (0) 2016.12.29
여우골 성탄절  (0) 2016.12.22
간장 종지  (0) 2016.12.1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