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아래에서 입 벌리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방에서 봄을 영접하려니 영 도리가 아닌 듯해서 남해안으로 내달렸다. 우리 국토의 울타리를 지키는 경계병인 양 건장한 체격의 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거제 해금강에 바로 도착했다. 작년에 보았던 백리향의 향기를 잊지 못해 다시 찾은 것이다. 땅은 아직 차렷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작년 여름의 땡볕을 간직한 바다는 가벼운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철썩이고 있었다.

낚시꾼들이 반질반질 닦아놓은 산길로 접어드니 우람한 육박나무가 떡 버티고 서 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노각나무처럼 껍질이 인생의 수수께끼처럼 벗겨지는 나무이다. 문득 길이 끊기고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경고판이 눈을 부라리는 해안초소가 나타났다. 간밤의 경계근무에 곯아떨어졌는지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티가 역력한 수도꼭지가 철조망 곁에 서 있지 않겠는가.

나는 수도꼭지를 보면 틀고 싶어진다. 바깥으로 나오고 싶은, 스프링처럼 튀어나올 것 같은, 저 지하에서부터 올라와 마지막 한 걸음이 부족해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물. 딱딱하게 얼어붙은 이 계절의 추위를 풀어줄 해방군처럼 고요하고 엄숙하게 앉아 있는 물.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숙인 이 낡은 수도꼭지에는 봄을 재촉하는 그런 물이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물이 나오기에는 수도꼭지가 너무 고집이 세게 보였다. 과연 물이 나올까? 수도꼭지는 왜 이제야 왔느냐며 원망이라도 하듯 처음에는 잘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 고비를 넘더니 이내 차고 깨끗한 물을 시원하게 내뱉었다. 우렁차게 뛰어나온 물은 육상선수처럼 바다를 찾아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콸, 콸, 콸.

어쩌면 육박나무의 뿌리도 건드리고 나왔을 그 물맛을 굳이 표현해야 할까. 봄이 단지 나의 눈두덩이만 두드린 게 아니라 저 발뒤꿈치에까지 골고루 육박해갔다는 건 말할 수 있다. 수피가 얼룩덜룩 군복을 닮기도 한 육박나무. 올해 59번째로 들이닥친 나의 봄을 육박나무 아래에서 만끽했다. 육박나무. 녹나무과의 상록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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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