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은 겨울을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름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채 부치고 장작 때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 요즈음 가난한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한 곳 마음 줄 계절이 없다. 계절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인색해지고 예민해지는 법. 그러니까 근래 들어 진만을 바라보는 정용의 마음이 꼭 그랬다. 얼굴만 봐도 괜스레 짜증이 나고 끈적끈적해지는 기분. 숨소리만 들어도 머릿속에서 팽팽한 철삿줄이 팅팅 소리를 내며 퉁겨지는 듯한 느낌. 그냥 이대로 찢어져서 따로따로 살까? 정용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작은 선풍기 때문이었다. 6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정용과 진만이 함께 자취하고 있는 반지하 자취방은 그야말로 습식사우나실로 변해 버렸다. 열기는 가두고 습기는 빨아들이는 방. 창문이 반대편 벽에 하나 더 있었더라면 좋았으련만…. 그쪽 벽 뒤는 말 그대로 지하였다. 정용과 진만은 몇날 며칠 잠을 설치다가 인터넷을 뒤져 4만원짜리 선풍기 한 대를 구입했다. 그 선풍기를 발치 아래에 두고 회전시키면 그나마 아쉬운 대로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한데, 지난달 중순 무렵인가, 누워 있던 진만이 발가락만 이용해 선풍기 고개를 아래로 더 푹 내린 다음부터 회전 기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회전 버튼을 눌러봐도 끼리릭 끼리릭, 기괴한 소리만 낼 뿐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사는데 선풍기의 회전 기능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건 말하자면 회전초밥집에서 저 멀리 오고 있는 장어초밥이니 스테이크 초밥이니 하는 것들을 바로 옆 손님이 날름날름 먼저 채가는 것과 엇비슷한 상황이 된다는 뜻. 정용은 한밤중 땀을 흘리면서 잠에서 깰 때마다 저 혼자 선풍기 바람을 독차지한 채 잠들어 있는 진만을 종종 목격했다. 그때마다 정용은 인상을 한 번 구기고 나서 다시 조용히 선풍기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려놓았다(어느 날 밤인가, 또 한밤중에 깨어 슬쩍 선풍기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리고 잠든 정용은 새벽 무렵, 무언가 갑갑한 기분이 들어 잠에서 깨고 말았다. 실눈을 떠 옆을 보니 진만이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팬티 바람으로! 그 뒤부터 정용은 잠에서 깨더라도 절대 선풍기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려놓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각각 2만원씩 내고 산 선풍기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고장 났으면 응당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 정용은 선풍기를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진만에게 꺼내진 못했다. 정용도 진만도 벌써 한 달 가까이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도 모두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으니, 바야흐로 아르바이트 춘궁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던 지지난 주 목요일엔 기어이 정용이 진만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도 아니었지만, 정용은 그러지 못했다. 말하자면 여름이기 때문에 낼 수밖에 없었던 화.

정용과 진만은 돌아가면서 점심 준비를 하곤 했는데, 그래 봤자 자취방 앞 편의점에 나가 라면 세 개를 사 끓이는 것이 전부였다. 여름이어서 주로 짜장라면이나 비빔라면을 많이 해 먹었는데, 그날은 어째 라면의 색깔과 냄새가 좀 달랐다. 그리고 무심코 그 라면을 한 입 먹은 정용은 그제야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너, 너, 이거…?”

“괜찮지? 오늘 복날이잖아. 그래서 일부러 불닭볶음면 했어.”

혀끝에선 벌써 아린 맛이 퍼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정수리 쪽에도 열이 올랐다. 선풍기는 정확히 밥상 가운데를 바라보며 맹렬히 돌고 있었다.

“야, 좀 생각이란 걸 하고 살자. 이렇게 더운 날 불닭볶음면이 말이 되냐?”

정용의 목소리가 높고 날카로워졌다. 우리가 무슨 깻잎이냐, 우리가 무슨 인삼이야? 같이 익을 일 있냐! 정용은 아예 젓가락까지 내려놓은 채 화를 냈다. 진만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정용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무룩해졌고, 말없이 혼자 불닭볶음면을 먹었다. 정용은 그런 진만을 바라보다가 아예 자취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후로 거의 2주 가까이 그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라면도 각자 끓여 먹었고, 잠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잤다. 정용은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게 다 지겹고 귀찮았을 뿐이었다.

어젯밤은 유난히 더 덥게 느껴졌다. 여름을 반으로 쓱 접으면 그 접힌 부분이 바로 어젯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등 뒤로 땀이 흘렀다. 정용과 진만은 불을 끄고 누워서도 계속 뒤척거리기만 했을 뿐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불쑥 진만이 말을 걸었다.

“덥지?”

정용은 대답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똑같지, 뭐.”

진만이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시원한 곳 데려가 줄까?”

진만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섬주섬 벗어두었던 반바지를 입었다. 정용은 귀찮았지만, 어기적어기적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진만이 데리고 간 곳은 동네 허름한 건물 이층에 위치한 동전 노래방이었다.

“노래를 하자고?”

정용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묻자 진만이 가만히 있어 봐, 하면서 천 원짜리 지폐를 노래방 기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들이 들어가 있던 방에 에어컨이 작동되었다. 오백 원을 넣으면 한 곡, 천 원짜리 지폐를 넣으면 세 곡을 부를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세 곡 부를 때까지 계속 에어컨이 나와.”

진만은 찡끗 웃으면서 노래방의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 반주가 시작되었다. 진만과 정용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 가만히 모니터에 뜨는 가사만 바라보았다. 단군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이중섭까지 다 나오는 노래, 노래방에서 가장 긴 노래….

역사는 흐르고 에어컨 바람도 흐르고, 여름밤도 흘러가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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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