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흐드러지게 필수록 아파오는 세월호의 기억 때문인가. 지난 1월에 비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들이 줄었다. 빼어난 학자를 삼고초려해 개설한 강좌에도 정성들여 준비한 세미나에도 사람이 찾지 않는다. 북적대던 공동체가 더러 절간처럼 고요하다. 이러다 망하려나…. 사람이 줄어드니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에 대한 생각도 많아진다.

공동체에서 공부하며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던 한 청년이 어느 산별노조의 기관지를 만드는 곳으로 떠났다. 몇몇 진보 언론사의 최종 면접까지 갔던 글 잘 쓰고 심성 좋은 친구다. 노조야말로 글 잘 쓰고 능력 있는 친구가 필요하겠거니 하면서도 하필 그 청년인가 싶어 짠하다. 1980년대 노동현장에 청년을 보내는 느낌이 이랬을까. 이제 서른 안팎인 그 친구는, 어쩌면 1980년대보다 더 엄혹한 시기에 자신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간난과 신고를 짐작이나 할까.

공동체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난 학자가 여행지에서 글 한 편을 보내왔다. 제목은 ‘내 삶의 진정한 영웅, 한창기’.

“내 삶에 영웅이 있다면 고교 시절 이후의 로버트 프립과 브라이언 이노, 대학 시절 이후의 러셀과 사르트르, 존 케이지와 마르셀 뒤샹, 그리고 우리 것에 눈뜬 이십대 중반 이후의 김소희, 박동진, 황병기, 박경리, 김유정,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바로 한창기이다. 70년대 주변에서 늘 보았던 <뿌리 깊은 나무>가 그가 발행한 책이며, 바로 그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을 낸 사람이고, 바로 그가 훈민정음에서 따온 한글 서체를 만들어낸 사람이며, 바로 그가 뿌리 깊은 나무 민중구술 자서전을 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문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팝송과 서구 문학과 철학에 사로잡혀 살던 스스로가 20대 중반, 김소희의 판소리를 듣고 나서야 서구에 함몰돼 극한까지 갔던 소외의 바닥을 쳤던 사정이며, 그러면서도 33살의 나이에 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어떤 자세로 학문을 하며 살아왔으며, 또 살아갈 것인가를 적은 글이었다.

“소위 선진국에 가서 살아보면, 가령 15년 전에 이민을 와서 15년 전 한국말의 화석을 구사하면서 15년 전 자신의 인식 수준으로 바라보던 한국이 오늘의 한국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이민간 나라 사람들이 1등 시민, 자신이 2등 시민, 한국인들이 3등 시민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한국을 폄하하며 우월감에 젖어 사는 비극적 캐릭터들이 꽤 있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생각하며 한국인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확신하는 저 이방인들, 자기 전공에 파묻혀 인간을 못 보는 고상한 학자들, 자기 전공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신식민지의 전도사들. 자신이 대상화하는 사람들의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고 오직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저 어리석은 폭력적 군상들, 속물들. 그것이 바로 부정하고 싶은 경망스럽고도 고상한 속물로서의 내 모습이 아닌가?

‘자신이 대상화하는 사람들의 말은 듣지 않고 오직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며 나만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여기 또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니 공동체 안팎에서 흔한, 작은 갈등이나 어려움에도 천박함과 비겁함의 끝자락을 드러내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강좌에 사람이 찾지 않아 보릿고개를 넘고 있는 이 시기야말로 공동체를 개설할 때의 초심이며 삶의 근원을 찬찬히 돌아보기에 좋은 때 아닌가.

대안연구공동체의 김종락 대표, 임상훈 연구위원, 이정우 파이데이아 학장, 유충현 연구위원이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를 정리하고 평가하는 좌담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멀리 산티아고 길에서 보내온 글을 읽으며 오랜만에 <특집 한창기>란 제목의 책을 뽑아들었다. 한창기는 몇 세대 앞선 선진적 언론 출판인이자 빼어난 문화비평가, 격조 높은 문화수집가, 전통 의식주의 파괴 없는 창조적 계승을 실천한 사람이었으나 나는 여기에 아득히 못 미친다. 그럼에도 공동체를 개설한 지 4년여, 그동안 어떤 대안을 모색하고 연구하고 실천해 왔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을 수 없다.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도 없이 그저 생존에만 급급해하진 않았는가.

공동체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던 청년과 학자는 목하 가시밭길을 자청했거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치열하게 자신을 돌아본다. 그 학자가 적었듯이, 주어진 상황을 피해 사람을 조롱하며 천리를 가는 것보다 그들과 더불어 한 걸음을 가는 것이 더 어렵고 소중하다. 우리에게 전선은 제도권 대학과 제도권 밖 인문학 공동체 사이에 있지 않다. 바로 내 안에, 우리 안에 있다.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다시 꽃 피어나고 세월호로 아픈 봄, 공동체는 한산하다. 작은 씨앗 뿌리며 새롭게 길 찾아 나설 때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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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