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하겠는가.” 2000년 전 유태인 학자 힐렐이 남긴 아포리즘의 첫 문장이다.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다. 그런데 힐렐의 가르침이 저 한마디에서 그쳤다면 그는 벌써 잊혀졌을 것이다. 이어지는 다음의 두 번째 문장이 첫 문장을 보기 좋게 뒤집는다.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나는 무엇이 되겠는가.” 힐렐의 경구는 단 세 줄이다.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지금 행동하지 않는다면 언제 하겠는가.” 두 번째 문장이 첫 문장을 뒤집듯이, 마지막 문장이 앞의 두 문장을 뒤흔든다. 짧은 글이지만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이 잠언을 소개한다. 대부분 타의에 의해 ‘경쟁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저 첫 문장이 자신의 안팎을 살펴보게 하는 ‘방아쇠’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시민대학 글쓰기 교실이나 학교 밖 인문학 강좌에 참여하는 중년 시민들에게도 종종 소개한다.

청년들에겐 첫 문장이 화두다. 성장기를 돌아보니 거기에 자기 자신이 없었다는 각성에 이어,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진입장벽을 새삼 확인한다. 1인 가구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두 번째 문장, 즉 더불어 사는 사회는 ‘지나간 미래’로 보일 것이다. 중년들 또한 당혹스러워한다. 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왔으며,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가 직면한 공통의 문제는 자기를 성찰하는 기회가 매우 부족하다는 데 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과거와 현재, 미래를 되살려 ‘조화와 균형의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질문을 바꿔보자. 질문을 달리하면 접근법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운전석에 누가 앉아 있는가.” 영성지능(SQ21) 평가척도를 개발한 인력자원경영 전문가 신디 위글워즈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즉 자기 삶의 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핵심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을 ‘자동차의 비유’라고 부른다. 우리 삶을 자동차 운전에 빗대면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내가 핸들을 잡고 있다면 운전은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이다. 문제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경우다. 가족 중 누구일 수도 있고 일터나 조직의 누군가가 핸들을 잡고 있을 수 있다. 소유, 지위, 명예, 성공과 같은 사회적 압력이 가속 페달을 밟고 있을 수도 있다. 운전자뿐 아니라 다른 승객과 불화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최악의 사태는 내가 핸들을 잡고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거나, 심지어 내가 자동차 바깥에 있는 경우다. 여기에 도로 상황까지 감안하면 운전의 메타포는 매우 복잡해진다.

유태인의 잠언과 영성코치의 질문을 나란히 놓을 수 있다. 힐렐의 첫 질문은 운전자를 확인하라는 요청과 만난다. 힐렐의 두 번째 질문은 위글워즈의 영성과 연결된다. 영성이란 용어는 쓰기가 조심스러운데 종교적 색채가 너무 짙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위글워즈는 탈종교 영성을 강조한다. 그는 영성을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엇, 신성함 혹은 탁월한 고귀함이라고 여겨지는 그 무엇인가와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 본래의 타고난 욕구”라고 정의한다(<SQ21 온전한 삶을 위한 21 영성지능기술>, 도승자 옮김, 신정 펴냄).

내가 운전석에 앉아야 하는 깊은 이유, 우리가 나 자신만을 위하는 데서 벗어나 다른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보다 큰 이유는 우리 모두에게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으로서의 영성의 회복 여부는 결속력에 달려 있다. 타인, 공동체, 다른 생명, 자연, 우주와 연결되는 끈이 없다면 우리 존재와 삶의 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차원에서 운전석에 앉은 자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다. 고맙게도 우리에게는 영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마법과 같은 유전자가 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브라이언 보이드 교수는 저서 <이야기의 기원>(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에서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진화를 거듭해왔다고 강조한다. 문화와 예술은 사회적 부산물이나 장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인문학자 엘렌 디사나야케도 저서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김성동 옮김, 연암서가 펴냄)에서 예술은 인간 본성에 해당하는 필수적 생존 수단이라고 역설한다.

보이드의 이야기와 디사나야케의 예술을 우리의 글쓰기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이때의 글쓰기는 문학의 한 장르라기보다는 듣기와 말하기, 읽기와 같은 수준의 일반적 글쓰기를 말한다. 우리는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글쓰기를 통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운전자와 대면할 수 있으며, 마침내 ‘더 큰 무엇’과 연결될 수 있다. 보이드에 따르면 이야기하기는 꿈꾸기와 다르지 않다. ‘지금, 여기를 넘어 지속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힐렐이 권고했듯이, 자기 성찰을 통해 영성을 회복하는 글쓰기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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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