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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하기로 했을 때, 내 마음을 끌어당긴 것 중 하나가 나무였다. 단지 외곽으로 경사가 느린 오솔길이 나있었는데 양옆으로 메타세쿼이아가 도열해 있었다. 우듬지가 아파트 7층 높이까지 올라가 있었다. 초록이 무성한 여름은 물론이고 단풍이 들 때도 미간이 순해졌다. 줄지어 선 나무들 사이로 보름달이 뜨면 사진을 찍어 여기저기 ‘배달’하곤 했다.

엊그제 아침, 오솔길을 걸어내려가다 메타세쿼이아 둥치에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을 보았다. 말간 갈색이었다. 한 뼘 높이도 안되는 풀잎에도 매달려 있었다. 지표 곳곳에 애벌레가 뚫고 올라온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우리가 땅바닥이라고 부르는 것이 매미 애벌레에게는 생사가 걸린 땅의 천장이었다. 올여름 매미는 6년 전 땅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이다.

매년 그렇지만, 땅 위로 올라온 매미는 행운아도 보통 행운아가 아니다. 만일 땅속으로 들어간 사이 그 위에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깔렸다면 땅속 애벌레는 ‘천장’에 죽어라고 이마를 치대다가 죽어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올해 나온 매미에게 행운이 계속되리란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짝짓기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언제 땅이 갈아엎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땅을 뚫고 올라온 매미들을 보며 세월호 아이들을 떠올리려다 말았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간 올여름 매미 소리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매년 그랬듯이 매미 소리가 시끄러워 밤잠을 설친다는 뉴스가 나올 때다.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혼잣말을 한다. ‘귀꺼풀’은 왜 없을까. 귀에도 눈꺼풀 같은 차단막이 있다면 숙면을 즐길 텐데. 물론 진화론에서 한참 벗어나는 망상이다. 시각과 함께 청각까지 잠이 든다면 인간 종(種)은 위험에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다.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속도는 시각보다 청각이 더 빠르다. 24시간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주 경계하는 귀를 고마워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갈수록 소리에 민감해진다. 늦은 시간,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소리가 선명해진다. 시계 초침 소리,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에어컨 실외기 소리.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이른바 백색소음이다. 한번 기계 소리에 붙잡히면 잠을 청하기가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그럴 때마다 귀꺼풀이 없는 것을 한탄하면서 어린 시절 고향에서 듣던 자연의 소리를 불러온다. 자발적 환청이다.

모낸 논에 물이 찰랑거릴 무렵이면 개구리들이 일제히 울어댔다. 빈틈이 없었다. 달 밝은 밤이면 그 소리들이 은박지 위를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때 소음 측정기가 있었다면 층간 소음기준을 훨씬 넘었을 텐데, 어린 시절 개구리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친 적은 없다. 초여름 뻐꾸기 소리도 어머니 품 같았다. 가을엔 또 어떻고. 귀뚜라미 소리가 머리맡에서 따끔거려도 깊은 잠에 들었다. 뿐인가. 온종일 새와 가축 소리, 비와 바람 소리가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눈뿐만 아니라 귀로도 살았다. 오감이 다 살아 있었다.

마침내 한밤중에도 매미 소리가 왁자해지자 딸아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잠자기는 다 틀렸네.” 50대 후반의 아비에게 매미 소리는 애틋하기만 한데, 20대 후반 딸에게는 성가신 소음이었다. 냄새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경비원 아저씨들이 화단에서 웃자란 풀을 베고 있었다. 나는 진하게 풍겨오는 풀 냄새가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이제 20대로 접어든 아들이 “이 냄새 너무 싫어”라며 코를 막는 것이었다. 충격은 계속됐다. 가족과 함께 캠핑을 다녀온 후배가 이르기를,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더니 글쎄 “아빠, 하늘이 너무 지저분해”라며 투덜댔다는 것이다.

세대 간 단절은 여러 층위에서 일어난다. 식성과 취향에서부터 정치적 성향,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하지만 감각에서 발생하는 세대 차이는 보다 근본적이다. 감각이 감성의 바탕이고 감성이 감정이입과 의인화로 대표되는 상상력의 핵심이라면, 감각에서 일어나는 세대 차는 말 그대로 ‘거대한 단절’이다. 나는 이 단절을 예의주시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의미의 문명 전환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과학기술이 제아무리 진전을 거듭한다고 해도 감각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다른 사람, 다른 생명에 대한 공감 능력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런 미래는 ‘사이코패스의 공동체’가 되고 말 것이다.

새 정부가 ‘걸어서 10분 거리 이내에 생활체육 시설이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공약을 실현하겠다고 한다. 대환영이다. 그런데 체육이 전부여서는 곤란하다. 몸만 튼튼한 사회는 매우 이상한 사회다. 건강한 몸이 건강한 정신과 만나야 한다. 나는 걸어서 10분 거리 이내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생활문예’ 프로그램이 상설화되기를 꿈꾼다. 마을주민들이 모여 책 읽기와 글쓰기를 비롯해 다양한 예술 활동을 즐기며 감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런 주민들이 마을을 넘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가는 주인일 것이다.

매미 소리는 소음이 아니다. 풀 냄새가 악취일 리 만무하다. 무턱대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서, 생활 속에서 감성을 되살린다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기계, 인간과 자연은 얼마든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지속가능한 미래’는 그때 도래할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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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