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지면을 통해 인사드립니다. 지난해 여기 경향신문에서 ‘이상돈·김호기의 대화’를 진행할 때는 다소 여유로우셨는데, 요즘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활동으로 무척 분주하시지요? ‘대화’를 책으로 묶어내면서 올해 우리 사회가 일대 정치적 격랑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어느새 선거의 블랙홀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사회 보수 세력의 선 자리와 갈 길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사회이건 보수나 진보가 그 사회 전체를 독점할 순 없습니다. 보수가 강조하는 자유·안정·성장·시장의 가치는 진보가 강조하는 평등·변화·분배·국가의 가치 못지않게 중요하며, 상황과 국면에 따라선 보수적 가치가 국가운영의 기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현실입니다. 선생님은 ‘대화’에서 이명박 정부를 “‘의혹’을 원죄처럼 안고 태어난 엽관(獵官) 정부”라고 혹평하셨지만, 일각에선 ‘선진일류국가’라는 슬로건에서 볼 수 있듯 우리 보수의 한결 성숙해진 모습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임기를 1년여 남긴 현재, 이명박 정부는 보수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수의 양대 축인 ‘시장적 보수’와 ‘안보적 보수’의 어떤 시각에서 보더라도 양극화 강화로 인한 사회통합의 고갈, 남북한 군사적 긴장 고조로 인한 한반도 평화 위기가 우리 사회의 선 자리입니다. 잇달아 발생한 권력형 비리들은 보수 정치세력의 도덕적 빈곤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위기의 보수를 구출하기 위해 등장한 한나라당 비대위의 활동입니다. 한 달여 전 비대위가 출범했을 때 기대한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경제민주화 조항’이라 불리는 헌법 119조2항을 만드신 김종인 선생님과 학문적 양심을 걸고 4대강 사업을 앞장 서 비판해 오신 선생님이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비대위위원장 역시 신자유주의에 대한 ‘규율’과 ‘생애주기 맞춤형 복지’를 강조해 오신 터라 잘하면 보수의 새로운 변신을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비대위 활동을 중간평가할 때 보수의 한계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됩니다. 보수든 진보든 혁신을 위해선 시민적 공감을 모을 과감한 개혁이 필요한데, 전체 숲이 아니라 개별 나무들에만 시선이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대국민 약속’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시민들이 기대하는 것은 상징적 제스처가 아니라 기득권계층의 실질적 양보를 구체화하는 비전 및 정책대안입니다.

우리 사회 보수가 대면한 최대의 과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고만 하는 수구(守舊)와 결별하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수는 전통을 존중하면서 점진적 사회개혁을 모색하는 것을 핵심 이념으로 합니다. 일찍이 부자와 빈자로 이뤄진 ‘두 국민’(two nations) 사회를 ‘한 국민’(one nation) 사회로 변화시키려고 했던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 벤자민 디즈레일리처럼 우리 보수 정치세력은 위기의 공동체를 구출하고 질 높은 사회통합을 일굴 수 있는 정치를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가 생산적 경쟁을 벌일 때 민주주의는 성숙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정치개혁은 정책과 인물의 혁신을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인간 불완전성의 존중이라는 보수적 가치에 걸맞게 시민에게는 겸손한 태도, 시장의 폭력에 맞서 국민 모두를 따듯이 안아줄 수 있는 재벌·노동시장·복지·교육 그리고 대외개방정책을 보여주고 이를 실천할 인물을 적극 발굴하는 게 보수가 갈 길입니다. 

경향신문DB



지난해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여행은 제천 보광암에 머무시는 명진 스님을 찾아갔을 때였습니다. 그날 명진 스님은 ‘이단이 돼라’는 화두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진보에게도 울림이 큰, 기존 관념과 관행에서 의연히 벗어나라는 이 화두야말로 지금 보수에게 가장 절실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월악산 깊은 계곡에도 진달래 피는 봄이 오면 함께 보광암으로 다시 한 번 소풍을 가시지요. 선생님의 건강과 건필, 그리고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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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