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옛날 똘똘이라는 남자가 공룡을 한 마리 잡았다. 공룡을 잡아 마을로 돌아온 뒤, 그는 고기를 조금 잘라서 가족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미소가 절로 떠오르는 정말 훈훈한 풍경이다. 까마득한 원시시대에는 모두 마음이 너그러워 그랬던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경제체제로 정착되기 전, 그러니까 100여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 어느 마을에 잔치가 벌어졌다. 산불로 마을에 뛰어내려온 멧돼지 한 마리를 용감한 돌쇠가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거대한 멧돼지여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돌쇠는 기꺼이 멧돼지를 골고루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원시시대의 똘똘이와 조선시대의 돌쇠가 자신이 애써 잡은 사냥감을 기꺼이 나누어준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매우 맛있는 고기라고 해도 너무 많으면 혼자서는 결코 모두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써 잡은 공룡이나 멧돼지가 아까워도 다 먹지 못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해서 먹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지어 탐욕을 부려 보관하려고 하면 아마 집은 썩은 냄새가 풍기고 아울러 병균의 온상지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항상 싱싱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고, 노쇠한 사람도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냉장고가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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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 자, 지금 바로 냉장고를 열어보자. 보통 위가 냉동실이고 아래가 냉장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냉동실을 열어보자. 검은 비닐 봉투가 정체 모를 고기와 함께 붙어 얼어 있는 덩어리를 몇 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아니면 닭고기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심각한 것은 도대체 어느 시절 고기인지 아리송하다. 아니 어쩌면 매머드 고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냉동실에는 냉동만두가 더 냉동되어 방치돼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만두인지 돌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이다. 보통 이런 돌만두는 새로운 냉동만두를 넣으려다가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다음으로 냉장실을 열어보라. 공장에서 오래 보관해서 먹으라고 플라스틱에 담아 포장한 식품들로 가득할 것이다. 플라스틱에 담긴 생수병과 음료수, 병에 담긴 여러 저장식품들. 냉장실에 잘 보관하면 유통기한 정도는 하루 이틀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유통기한은 실온을 기준으로 하니까 말이다. 심지어 호박마저도 진공포장으로 채소 칸에 들어 있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냉동실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최근에 대형마트에서 사온 제품들 뒤편에 정체 모를 플라스틱들과 비닐 봉투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냉동실과 냉장실에서 정체 모를 봉투들,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식품들을 꺼내서 없앨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그걸 먹고 탈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한 일 아닌가. 음식물 쓰레기를 담는 종량제 봉투에 그것들을 모두 쓸어담아, 집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 투척한다. 다시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여니 한결 청결해 보인다. 그러나 왠지 허전하다. 냉장고가 비게 되면, 무엇인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즐거운 쇼핑 시간이다. 쾌적한 대형마트에서 가족들의 해맑은 웃음과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며 정말 싱싱한 포장식품들을 그득 사오면 되는데 말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혼자 다 먹을 수 없었던 원시시대

사냥감을 나눠먹던 풍경

대형마트와 냉장고 사이의 삶

자본주의가 인간을 위태롭게 한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처음 냉장고가 없어졌을 때, 몹시 불편할 것이다. 어떤 습관이라도 고치기는 무척 힘든 법이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재래시장에 들러 싱싱한 식품을 적당량 사서 바로 요리해서 먹는 생활이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곧 냉장고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 냉장고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냉장고와 대형마트는 공생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냉장고를 대량생산하는 거대한 산업자본,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거대 자본, 그리고 그곳에 진열된 식품들을 대량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산업자본이 도사리고 있다. 묘한 공생 관계 아닌가. 냉장고는 대량생산된 식품들을 전제하고 있고, 대량생산된 식품들은 냉장고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야 냉장고와 대형마트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던 우리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에 가족들의 건강, 이웃과의 공동체 생활, 생태, 재래시장 그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었고, 거대 자본은 그 덩치를 늘려갔던 것이다. 당연히 대량생산된 식품에는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한 인위적인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건강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과들도 냉장고에 저장하는 순간, 바구니에 담겨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기회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이웃과의 돈독한 관계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냉장고에 방치되어 있는 식품들은 오늘도 엄청나게 버려지고 있고, 동시에 대량생산을 위해 고기나 채소들에는 가혹한 생육 방법이나 유전자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생태 환경인들 무사하겠는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 그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절망한다. 자본주의는 너무나 거대한 체제이기에, 우리가 길들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 아닐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없애라! 한 번에 없앨 자신이 없다면, 냉장고의 용량이라도 줄여라! 가족 건강 문제, 생태 문제, 이웃 공동체 문제, 재래시장 문제가 그만큼 해결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 “여자가 여자에게 추천하는 속이 넓은 냉장고”의 유혹, “살고 먹고 사랑하는 데 필수적인 냉장고”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냉장고의 폐기, 혹은 냉장고 용량 축소!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는가!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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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