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 수가 좀 많은 데다가 다들 역마살까지 있는 편이라 여기저기서 모아온 물건이 한데 모인 까닭이다. 웬만한 건 함부로 버리지 않는 습관도 여기에 한몫하였다. 그러다 보니 생기는 약간의 공간 부족이 문제이긴 하지만, 인과응보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긴다. 아무리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지만 사물도 나와 세월을 겪으며 소소한 역사와 이야기가 엮인 것인데 매몰차게 다루는 건 어쩐지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그래서 일 년 내내 꺼내보지도 않은 채 먼지만 쌓여가는 것들이 허다하지만, 이 ‘미련 덩어리’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오늘도 한 지붕 아래 같이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의미 없이 보관만 되고 있는 물건들과는 달리 특별한 기회를 만나 빛을 발하는 물건도 있다. 허름해진 이불이 훌륭한 덮개로 활용되고, 다 마신 와인의 코르크 마개는 서랍 손잡이로 둔갑하기도 한다. 안 버리고 모아놓은 온갖 크기와 모양의 상자 및 가방은 내가 필요로 하는 그 어떤 용도도 다 충족시켜줄 정도로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리본, 철사, 끈, 천, 종이 등의 자재는 물론, 수많은 종류의 통과 도구, 부속품과 공구가 모아져 있어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이 엄청난 물건의 목록을 정리하고 파악하는 역할을 하는 어머니는 우리 집의 ‘구글’이나 다름없다. 필요한 걸 어머니께 ‘검색’하면 거의 예외 없이 필요한 결과를 찾아서 내놓기 때문이다.

제 기능을 못 한 채 처박혀 있던 무언가가 우연한 기회에 차출되어 세상이 돌아가는 데에 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작은 기적과 같다. 혹시 몰라서 남겨 두었던 보잘것없는 작은 요소가 딱 필요할 때를 만나 톡톡히 제 역할을 할 때, 그때만 느낄 수 있는 묘미와 쏠쏠함이 있다. 가장 근본이 되는 심리는 아마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기쁨일 것이다. 버린다는 것, 그것은 차디찬 단절을 의미한다.

쓰레기통에 들어간 순간, 문명의 총화였던 하나의 물건은 순식간에 현대기술이나 자연의 원리로 처리 불가능한 이물질로 전락한다. 누군가의 기억 또는 손길이 미치는 곳에 여전히 있는 물건은 아직 죽지 않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비록 먼지 쌓이고 있지만 어디엔가 요긴하게 쓰일 가능성이 살아있는 것과 영원히 사라진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리고 우연의 사슬이 찰칵 소리를 내며 물건과 들어맞았을 때, 그 작은 가능성은 실현되어 이 허망한 우주 속에서 존재에 의미를 조금 더 실어주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재활용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적 재활용 시스템이 등장하기 전에 물건의 재활용은 말 그대로 다시 사용하는 행위였다. 오늘날처럼 물건을 재료별로 구분하여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건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종이, 플라스틱, 철, 유리 등의 소재로 인식함으로써 물건의 폐기는 체계화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금 잘 쓴다’는 재활용 본연의 의미도 어쩌면 폐기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건을 구성 물질로 환원하여 보는 시점은 결국 경제적 논리로 그 재활용의 의미를 재정의하게 되고, 그 결과 심지어는 재활용이 오히려 환경에 나쁘다는 반직관적 결론에 이르기까지 한다. 가령 알루미늄은 광물을 캐내는 비용이 높아 재활용하기에 좋지만, 플라스틱은 유가 인하로 재활용이 오히려 더 비싸다는 식의 논리이다. 재활용이 재료공학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그동안 수거해 가던 물건을 더 이상 가져가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 얼마 전, 그동안 스티로폼을 수거하던 업체가 폐스티로폼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수거를 거부하거나 이런 종류의 물건을 아예 일반 쓰레기로 분류해달라고 요청한 일이 일어났다. 스티로폼 역시 유가 하락으로 인해 원래 재생원료로 가공하여 수출하던 것이 경제성이 떨어지면서 수거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어떤 플라스틱의 경우에는 이를 수거, 분류, 그리고 다시금 원료로 만드는 가공 과정에서 탄소가 더 많이 배출되기 때문에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분석도 있다. 물건의 재활용을 재료의 재활용으로만 보는 순간 당연히 그 물건은 원자재 거래시장의 원리에 따라 취급을 받게 되고 재활용 본연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나는 이사를 하면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 들었던 물건들, 그러나 형편상 이제는 헤어져야 할 물건들을 어찌해야 하나 골몰하게 되었다. 그냥 버리기엔 너무 멀쩡하고 아까운 것들이라 하나하나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 그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마침 시골에 요양하러 가시는 장인·장모님이 필요하다며 식탁 세트를, 같이 온 삼촌이 탐난다며 선반과 바비큐 틀을, 후배는 거실 의자와 카펫을 각각 가져가거나 맡아주기로 했다. 또 뒷집에서 이사 나가는 아저씨는 세탁기를, 이사 들어오는 아저씨는 옷걸이와 부엌 도구를 시원하게 처리해주었다.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새 물건을 팔아야 할 업체들이 장사가 안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새 보금자리를 찾아 제2의 삶을 시작할 정든 물건들을 생각하면, 야생학교는 뿌듯할 따름이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김산하의 야생학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래 가해국가, 한국  (0) 2016.11.16
재활용이란 다시금 잘 쓰는 것  (0) 2016.10.19
팜유, 이제는 알아야 할 단어  (0) 2016.09.21
더위의 진짜 충격  (0) 2016.08.17
증강현실? 소외현실!  (0) 2016.07.20
공존의 자격  (0) 2016.06.2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