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즉위한 이래 23년 동안 우근(憂勤)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하늘과 백성의 마음을 따를 방법을 강구해 왔지만 어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1799년 12월, 겨울 같지 않은 날씨에 천둥 번개가 계속되자 날이 밝기도 전에 신하들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정조가 건넨 고백이다. 정조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라며 어떤 질책과 건의든 달게 받을 테니 천재지변을 해소시킬 방법을 내놓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무슨 말이든 해달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모인 신하들은 중직을 맡고 있는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큰 잘못을 범한 이들이라며 당장 내치고 벌해달라고 하였다. “경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돌릴 필요 없다. 모두 나 한 사람의 책임이다.” 자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건넨 정조의 답변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오늘 우리는 천재지변이 통치자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국민들을 보호하고 힘을 다해 돕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위가 높고 권한이 강할수록 책임도 커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상식만큼은 200여년 전이나 지금이 다르지 않다. 가슴 무너지는 국가적 재난들이 연이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은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내 책임입니다”라는 통회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것이 연일 광화문을 채우고 있는 분노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20년 전, 즉위 3년차의 정조는 영릉 행차길에 남한산성에 묵은 적이 있다. 자신의 행차길에 가득 찬 남녀노소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정조는 말했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번에 배를 타고 백성들에게 오면서 이 경계가 더 절실해졌다.” 물은 그저 낮은 곳으로만 흘러들어 늘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물이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음을 정조는 알았고, 20여년 동안 마음에 새겼다.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자신이 어디에 떠 있는지 모르기에 무엇을 책임져야 하고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통치자에게 물은 더 이상 인지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역동하는 실체적인 힘이라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송혁기의 책상물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장공비와 무장법비  (0) 2017.01.25
거짓말과 개소리  (0) 2017.01.11
정조의 고백  (0) 2016.12.28
법과 부끄러움  (0) 2016.12.14
330년 전의 상소문  (0) 2016.11.30
농단하는 정치  (0) 2016.11.1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