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간의 전쟁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나, 급박한 느낌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느낌이 단순한 피곤에서 오는 것인지,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바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도식적인 관점에서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도 어느 정도는 우리 자신의 사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 위기와 관련해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는 간단하다. 그것은 전쟁, 특히 핵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지만, 그것을 정책집행자들에게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이게 할 방도가 없는 것이 문제다. 북쪽의 입장에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이데올로기이다. 남쪽에서는 그것을 현실적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도덕적 당위로까지 올려서 생각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을 손익 계산과 전략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데에 익숙하다 보면, 삶에 작용하는 도덕적 당위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게 된다. 북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이데올로기를 실감으로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도 우리 삶에 존재하는 깊이를 의식화하지 못하는 것에 관계되는 일인지 모른다. 유화책과 경제 이익의 제공이 북의 태도를 변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만으로 사태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정치에도 절대적인 가치와 목적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놓치는 일이다.


전쟁 도발 행위에 맞서는 대책은 군사적 억제책이다. 전쟁은 최종적으로 힘과 힘의 대결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승리를 목표로 한다. 승리는 미리 예상될 수 있어야 한다. 승산 없는 전쟁 도발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 강행을 선언하고, 미사일 발사 준비를 하고, 휴전협정의 무효를 선언하는 등, 그 동기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적어도 그 현실적인 움직임에 있어서, 전쟁 위협의 강도를 높여 간 것은 틀림이 없다. 여기에 대하여 B-25 비행, 미사일 요격 시스템의 배치, 핵 전함 이동 등 한·미·일의 대응 조치가 있었다. 이러한 억제책이 북의 전쟁 시위를 완화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틀리지 않은 생각일 것이다.


북한의 전쟁 위협을 지지하는 세력이 거의 없는 국제적 환경도 위기 완화의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미·일의 정부가 강하게 항의하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국민적 여론을 움직인다는 점에서도 전쟁 위협이 북한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북한에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전쟁 위협에 부정적인 것은 보도된 바와 같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남북 간의 핵 충돌은 체르노빌의 핵폭발을 동화 속의 사건처럼 보이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국에서 별로 보도되지 않은 것은 피델 카스트로 쿠바 전 국가평의회의장의 반대 의견이다. 그는 쿠바가 북한의 우방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한반도의 핵전쟁 위험은 1962년 10월의 쿠바 핵 위기에 버금가는 일이라 말하고,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남북의 국민의 희생은 물론 세계 인민의 70%가 피해를 입게 될 것인데,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이 북한의 의무이고 정의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물론 미국에도 자제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카스트로가 지난 9개월 동안의 침묵을 깨고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에 발표한 것인데, 한반도 사태를 그만큼 심각하게 본 것이다. (그간의 침묵은 중요한 논의 공간을 함부로 차지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고 그는 말하였다.)


北 김정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지도 (경향DB)


현실 군사력의 대비나 국제적 지지 가능성으로나 승산이 분명치 않다는 것은 결과의 확인 이전에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위협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 동기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하나는 그것이 새로 등극한 젊은 지도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인민의 단합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라는 것이다. 위기를 단합의 방편이 되게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정치 전략이다. 선군정치(先軍政治) 체제하에서, 새 지도자의 위치를 강화하는 데에 그러한 위기 전략이 특히 중요한 몫을 해낼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계산이다.


얼마 전 서울대 하영선 교수와 고려대 서진영 교수는 오늘의 위기상황을 토의하면서, 북의 국가정책 지표를 병진론(竝進論)으로 설명하였다. (조선일보 대담, 4월19일). 병진론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핵개발과 경제발전이 북의 정책의 두 축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토론에서 지적된 사항의 하나는 핵개발과 경제발전, 두 목표가 서로 모순된 것이라는 점이다.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북이 필요로 하는 외국의 투자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렵고 그것 없이는 경제발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하겠지만, 북의 시각에서는, 두 목표가 반드시 모순된 것만은 아닐 수 있을 것이다.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선결조건은 자주권을 튼튼히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핵을 포함한 군사력 강화가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있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문구는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북한의 불바다 웅변에는 군사력의 강화와 전쟁 준비가 미국과 한국의 전쟁 위협에 대한 대항 조처라는 주장이 들어있다. 그것은 별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들린다. 그러나 영국의 군사전문가 안드레아 버거는 서방의 관점과 다른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한·미 군사훈련이나 연습과 같은 것이 북한에는 전쟁 위협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북의 역사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버거의 설명으로는, 군사 연습을 가장한 병력 이동을 갑자기 현실로 바꾼 것이 북이 시작한 6·25 전쟁이다. 그리하여 미국도 북한의 과민성을 완화해볼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버거는 말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조처들이 북의 핵개발 시간을 벌어주는 일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여튼 지난 1월에 북의 국방위원회 그리고 이어서 최고인민회의는 핵보유의 절대적인 필요를 나라의 명줄이 달린 문제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이것은 피침(被侵) 가능성에 대한 과민 반응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대책의 일부를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을, 지도자의 존재와 관련하여 자주 쓰는 “존엄”이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말하자면, 절대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불가침의 성역 방어를 위한 군사 모험을 포기하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 한 가지 이념으로 굳어진 가치와 목적 이외에도 인간의 삶의 기초가 되는 다른 가치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설득할 도리가 있는 것일까? 현실적 효과를 당장에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쪽에서 정의하는 성스러움을 넘어가는 성스러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열림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것이 최소한으로 규정될 때 그러하다. 이 최소한은 생명의 귀중함이다. 그것을 집단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모든 것의 기초를 없애는 일이다.


마르크스주의 혁명아 카스트로의 우려도 이에 관한 것이다.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인정은 같은 민족의 삶, 모든 인간의 삶의 요구, 그리고 그 파괴의 무자비성에 대한 의식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어떤 삶이 존귀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쉬운 의견의 일치가 없겠지만, 최소한에 대한 일치 그리고 그 깨달음에 깊이가 있다면, 그것으로 향하는 길이 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의 위험은 우선 사실적 조처를 요구한다. 여러 이해관계의 거래와 심리전술적 고려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본은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인정이다. 비단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정치적 교환은 여러 다른 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근본적인 층이 있다. 여기에 발디딤을 확실히 하는 것은 현실 정책의 고려에 엄숙성을 부여한다. 이것을 현실 대책 속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적어도 이 차원을 함께 열어 보는 도리는 없는 것일까?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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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