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바뀌고 있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북한 정권교체도, 정권붕괴도, 침략도 하지 않고 체제를 보장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미국을 믿어달라”고도 했다. 외교언어치곤 거칠지만 진정성은 묻어난다. 그는 지난 3일 국무부 직원 강연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틸러슨의 발언은 정확히 북한의 흉중을 꿰뚫는다. 김정은 정권의 제1목표는 체제 생존이다. 핵개발도 미국의 안보 위협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고 북한은 주장해왔다. 그런데 미국이 체제 보장을 공개 약속했다. 북한의 핵개발 명분과 논리는 거대한 모순에 직면하게 됐다.

이렇게 선명한 반전도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처음에는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며 대북 선제타격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한반도는 전쟁위기설로 설설 끓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화를 거론한다. 대화분위기 조성을 위한 조건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핵과 미사일 실험 동결이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3일(현지시간) 워싱턴 국무부 청사에서 직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워싱턴 _ AP연합뉴스

국가 관계는 말과 행동으로 구성된다. 말로 명분과 정당성을 주장하고 행동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이제 북한은 틸러슨의 말에 대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말 한마디로 70년간 쌓인 북·미 간 적대감과 불신을 해소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북핵 게임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북한의 대외전략 환경 변화는 대미관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혈맹’ 중국의 태도변화도 북한을 곤혹스럽게 한다.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후 북한에 실질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대북 원유공급 중단을 시사하고,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에도 적극적이다. 북한으로선 하나같이 아프다. 북한이 핵·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하지 못하는 데 미국의 군사적 실력행사와 중국의 대북 압박이 작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북한은 남한 내에서도 ‘우군’을 잃고 있다. 구조적으로 북한의 ‘적대적 이익공동체’인 남한 보수는 허약해지고 있다. 가장 최근의 자유한국당 여론지지율은 8%다. 불과 열흘여 전인 지난 대선에서 이 당 후보가 20% 넘게 득표한 것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질 정도다. 보수는 대선에서 특유의 색깔론과 이념공세를 폈지만 먹히지 않았다. 과거 보수의 안보공세에 쩔쩔매며 변명으로 일관하던 진보후보가 오히려 보수후보들을 ‘가짜 안보장사꾼’으로 공격하는 이변이 연출됐다.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아마도 북한을 가장 힘들게 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공존 추구와 대화를 중시하는 대북원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는 북한을 비난하고 강경정책을 구사하는 보수 정권이 상대하기 쉬울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고마운’ 존재였다. 남북 간 적대감은 북한에 논리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은 북한의 체제 및 핵개발 논리의 명분과 당위를 갉아먹는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중장거리 ‘화성-12’미사일 발사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며 엄중히 경고한다”며 단호한 대응을 지시했다. 겉으로 북한을 비난하면서 뒤로 남북정상회담을 구걸하며 북한에 돈을 건네려 하거나, 선거 때 북한군에 남쪽으로 총을 쏴달라고 부탁하는 보수 대통령, 보수 정당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같은 대외정세의 변화는 김정은 정권에 새로운 전략적 선택을 요구한다. 한국·미국·중국 3국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를 국정 최우선 목표로 삼고 공조하는 것 자체가 오랜만의 일이다. 평화적인 방식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원칙도 공유하고 있다. 북핵 문제 해결에 큰 진전을 보였던 6자회담과 9·19합의 등을 연상시킨다. 한국과 미국이 대북접근 방식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북한에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북핵·미사일이 동북아 및 세계평화·안정에 실질적인 위협으로 대두된 지금 북한 역시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해 있다.

핵개발을 통해 안보 우려를 해소하겠다는 북한의 발상은 그 자체로 딜레마를 안고 있다. 상대국도 핵으로 무장하거나 기존 핵무장력을 강화하게 되므로 안보 우려가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핵개발로 강국이 되겠다는 계획 역시 무모하다. 예컨대 파키스탄은 핵보유국이지만 강국으로 발돋움하지 못했다. 핵개발은 강국을 보장하지 못한다.

특히 주민 삶을 희생하는 핵개발은 오히려 국가의 토대를 약화시킨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저서 <부수적 피해>에서 “다리의 운명은 가장 약한 교각이 결정한다”고 했다. 북한이라는 다리에는 수많은 교각들이 있다. 하지만 핵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부실하고 강도가 약하다. 김정은은 핵을 자랑하기에 앞서 바우만의 경고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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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