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 있는 날이면 난 언제나 즐거우면서도 기분이 찜찜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모임은 원래의 취지가 소외된 채 진행되다 끝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환영회라 모여도 아무도 환영하지 않고, 환송회라 모여도 아무도 환송하지 않는 자리를 보는 것이 싫었다. 물론 건배할 때 한두 마디로 왜 모였는지에 대해 언급은 하지만, 누구는 고기 굽고, 누구는 술 마시고, 누구는 옆사람 하고만 떠드는 회식 자리에서 정작 모임의 근본적 목적은 쉬이 잊히는 것이었다. 잘 놀았으면 됐지 뭐, 혹자는 말한다. 너는 됐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이왕이면 나는 무엇을 왜 하는지에 충실하고 싶다.

스마트폰 게임 '포켓몬 고'

소외현상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너무나 일반적이라 제대로 인식조차 되지 않고 있다. 가령 애인이나 친구끼리 카페에서 만나 각자의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은 이제 흔한 광경이다. 이것이 만남인가? 물리적으로만 근접거리에 있되 각자 전혀 다른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것도 만남으로 칠 정도로 단어의 정의를 후퇴시킨다면 더 이상 그 언어는 유용하지 않다. 사람들은 누구와 있어도, 어디를 가도, 자기 손에 쥔 검은 네모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경치의 변화, 지나치는 사람들, 건축물의 구조, 가로수의 미학 등은 이제 아예 피사체가 아니다. 그것이 검은 네모를 통해 조망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체 어떤 공간의 인테리어 자체가 왜 필요한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준에 우리는 이르렀다. 누구나 고개를 처박고 귀를 틀어막고 있는데 벽의 마감이나 조명, 음악, 실내장식 따위가 왜 중요한지. 환경디자인이나 공공디자인과 같은 분야의 존재가 무색할 지경이다.

사물의 껍데기에 눈길을 안 주는 것은 그래도 그나마 덜 심각하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본질의 소외이다. 내가 현재 있는 공간이나 사회적 상황이 경험의 중심으로부터 주변부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는 전혀 무관한 콘텐츠가 채워지는 것이다. A를 만나면서 동시에 B와 문자하고, C와 카톡하고, D에 대응하는 것은 A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A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공원의 푸른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지나간 예능을 다시 보기 하는 것은 공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공원과 나무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말로 ‘멀티’라 부르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경험의 질적 퇴화 또는 경험의 피상화(皮相化)일 뿐이다. 결국 남는 것은 나와 검은 네모의 폐쇄회로뿐, 모든 것은 그저 통과해야 할 하나의 매트릭스, 스마트 세상이 작동하기에 필요한 기질(substrate)로 전락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고 해도 상대방은 이 말조차 듣지 못한다. 하늘과 햇빛은 그저 화면을 흐려 보이게 하는 거추장스러움일 뿐이다.

이 상황에서 쿵 하고 나타난 것이 ‘포켓몬 고’이다. 속초에 관해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없는 이들이 떼를 지어 속초로 향하고 있다. 엑스포공원에 ‘있다’는 괴물은 엄연히 화면에만 ‘있을’ 뿐인데도 그곳에 가야만 활성화되는 알고리즘 하나 때문에 정말로 ‘있다’라는 철학적인 실존을 부여받는다.

물론 어느 회사의 프로그래머들이 임의대로 정한 알고리즘이다. 그러나 게이머들에게 공간과 몬스터의 출연 간의 관계는 거의 자연의 신비에 해당되는 진리영역이다. 세상은, 이제 폰이 정하는 바에 따라 유의미 또는 무의미하다.

‘포켓몬 고’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증강현실’의 승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본질과 의미의 후퇴이다. 실록이 푸른 공원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예능만 보던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공원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세상을 차단하고 있지만 적어도 그 차단으로 인한 그와 세상 간의 관계는 정직하다. 바로 이 점에서 ‘포켓몬 고’의 사용자는 전혀 다르다. 비록 속초 땅을 밟고 있어도 그가 온 목적, 그가 보고자 하는 것, 그가 골목마다 마주하고 싶은 것의 일체는 속초와 무관하다. 그는 속초의 삼차원적 매질만을, 오직 그것만을 취하러 온 것이다.

한 공간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문화, 역사, 자연이 철저히 배제된 동기로 그 공간을 방문하는 초유의 사태인 것이다. 이보다 공간을, 아니 세상 전체를 극단적으로 대상화한 시도는 없다. 이는 성의 상품화 같은 기존 문제보다 더 진전된 심각한 대상화이다. 마치 자신의 애인을 애무할 때 상대방 육체의 물성만을 취하면서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상상으로 투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방문에 의해 매출이 오른 속초 상인들이나, 게임 때문에 들렀다가 속초도 구경하는 이도 있다는 말로 속초는 물론 공간과 경험의 본질을 모독하지 말라. 증강현실이 검은 네모의 ‘현실성’을 높이고, 그것을 투사시킨 현실을 ‘증강’시켰다고 말하지만, ‘증강’된 만큼 그 현실의 실체와 본질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도해야 한다. 오히려 증강현실로 인해 발생하는 것은 ‘소외현실’이다. 게이머들은 ‘포켓몬이 있다’라는 표시를 하염없이 찾아 서성인다. 만약 ‘있다’가 이런 것이라면, 야생학교는 차라리 ‘없고’ 싶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일반 칼럼 > 김산하의 야생학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팜유, 이제는 알아야 할 단어  (0) 2016.09.21
더위의 진짜 충격  (0) 2016.08.17
증강현실? 소외현실!  (0) 2016.07.20
공존의 자격  (0) 2016.06.22
새가슴을 헤아리는 마음  (0) 2016.05.24
고기 말고 ‘다른 것’ 시킬 자유  (0) 2016.04.2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