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고전에는 벗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다. <논어>와 <사기> 이래 진정한 벗이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와 사례들이 무수히 제시되어 왔으며, 성어로 널리 알려진 것만 해도 적지 않다. 진정한 벗에 대한 가장 오래된 소망 가운데 하나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늘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절망해 온 셈이다. 남들이 나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크고 작은 관계들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자신의 금(琴) 연주에 담긴 마음을 유일하게 읽을 줄 알았던 종자기가 죽자 금의 현을 끊어버렸다는 백아의 이야기가 지음(知音), 지기(知己)의 유래로 유명하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다”라는 관중의 고백은 더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부러움을 주어 왔다. 동업하면서 더 많은 이득을 취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나, 전쟁터에서 패하고 비겁하게 도망갔을 때, 주군과 동료의 죽음에도 혼자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했을 때조차도, 모든 이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끝까지 나를 믿고 변호해 주는 친구. 그런 친구를 가진 이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지기지우를 가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19세기 역관 변종운은 <지기설(知己說)>이라는 글에서, 세상에 얼굴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마음이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나를 알아줄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포숙아나 종자기라 하더라도 특정한 경험과 분야 안에서 관중과 백아를 알아준 것일 뿐,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다 아는 지기지우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너무도 나약하기에,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기지우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상처를 받는 일도 적지 않다. 변종운은 나를 알아줄 이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내가 나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대면하고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앎은 얕은 채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곤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나 자신을 바로 알고 그 모습 그대로 소중히 여기는 데에 있다. 그럴 때 비로소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 내가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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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