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추억이 담긴 소중한 공간이 있다. 무언가 아득하지만 일상을 버텨내게 해 주는 곳이 있다. 나에게는 그곳이 ‘동물원’이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손을 잡고 몇 번 다녀온 것이 전부이고 이제는 빛바랜 사진 몇 장으로만 남았지만, 그만큼 그때의 설렘이, 한가로운 평안함이, 나의 몸에 남았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지나며 무언가 힘든 시기가 찾아올 때마다 ‘이 일만 끝내면 혼자서라도 동물원에 다녀와야지, 잘 마른 잔디 위에 앉아서 김밥이나 샌드위치 같은 걸 먹으면서 하루 종일 기린을 바라보는 거야, 이 일만 끝내면…’ 하고 버텼다. 연구실에서 밤새 발제 준비를 하고 논문을 쓰면서 나는 어린 시절에 본 기린을 자꾸 상상했다. 그건 아마도 어린 시절의 한가로움을 추억하는 일이었겠다. <슬램덩크>라는 만화책을 보거나 EVE의 노래를 듣는 것도 위안이 되었지만, 동물원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논문을 완성하고도 정말로 동물원을 찾지는 않았다. 짧은 여유가 찾아오면 동물원은 연구실과 아프리카의 간극만큼이나 멀어졌고, 갈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은 다시 밀려들어왔다.

사실 1980년대 중반의 부모들이 특별한 날 아이들과 함께 갈 만한 장소는 동물원 말고는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이제 다섯 살이 된 나의 아이는 갈 만한 곳이 늘었다. 지방의 소도시에 거주하고 있지만, 어린이를 위한 뮤지컬을 올해만 두 번을 보았고, 원한다면 언제든 집 주변의 운동장만 한 프랜차이즈 키즈카페에 가거나 어린이열람실이 마련된 시립도서관에 갈 수도 있다. 아이는 동물원에도 흥미를 보인다. 공룡을 보러 가자고 하더니 ‘멸종’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나이가 되었는지 이제는 코끼리와 원숭이를 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봄볕이 좋은 주말에 아이와 함께 동물원에 다녀왔다. 혼자서는 그렇게 마음만 앞서더니, 아이의 “나 동물원 가고 싶어!” 하는 한마디에는 “응, 그래, 가야지 동물원…” 하고 몸이 움직였다. 동물원에는 나를 닮은 부모들이 많았다. 아마 그들도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동물원을 찾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저마다 절반쯤은 설레고, 절반쯤은 지친 표정으로 아이들과 함께 돌아다녔다.

그런데, 아이가 동물을 바라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무언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동물을 가두어 두고 관람한다는 그 행위가 옳은지 고민할 만한 나이가(인간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원들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만국박람회에서는 흑인과 황인종을 동물처럼 전시해 두고 구경하게 했다. 그러한 야만의 시대가 있었다. 다른 존재를 포획·감금·사육·전시·관람하는 일은, 그러한 공간에서 평안함을 느끼는 일은 사실 슬픈 것이다. 원숭이를 구경하는 아이에게 일부러 “원숭이는 사람하고 참 닮았는데 저 안에 있다, 그렇지?” 하고 물었다. 아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오, 오, 하고 기묘한 표정을 하고 원숭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몇몇 가족은 원숭이에게 자신들이 먹던 음식을 던져 주었다. 그 뒤에는 “동물에게 먹이주기의 다른 말은 동물학대입니다” 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지만, 손을 내밀어 음식을 받아먹는 원숭이를 바라보는 것으로 나도 그 학대에 동참했다.

철창을 두드리는 아이들,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말리지 않는 부모들, 이전에는 동물들만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동물원의 사람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만 동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사람을 보고, 사람도 사람을 본다.

얼마 전 찾은 집 근처의 작은 동물원에는 ‘동물체험장’이 있었다. 나는 유치원생 아이를 둔 학부모로서, 체험이라는 것이 대개는 아수라장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불안해졌다. 아이와 함께 들어간 체험장에는 20여마리의 병아리가 있었다. 무릎 높이의 울타리를 두고, 아이들은 병아리를 양손에 쥐고 주무르고 있었다. “여보, 저거 한 마리 잡아서 애 좀 줘” 하고 말하는 부모와, “만지면 병아리가 싫어하니까 눈으로만 보자” 하고 말하는 부모가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병아리가 만져보고 싶은지 조용히 물었다. 그가 그렇다고 해서, “너도 누가 만지고 때리면 싫잖아, 사람도 병아리도 허락 없이 만지면 안되는 거야” 하고 말해 주었다. 굳이 동물을 쓰다듬고, 먹이를 주고, 울음소리를 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체험은 오히려 약자를 존중하지 않는, 타인에 대한 폭력과 통제를 정당화하는 아이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어린 내가 그랬듯, 아이는 동물원을 특별한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동물원에 가고 싶어” 하고 종종 말한다. 나는 아마 내년에도 아이와 함께 동물원을 찾게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이에게 동물뿐 아니라 동물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고 싶다. 언젠가 그가 동물원의 설렘과 동물에 대한 미안함을 동시에 감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이후는 그와, 그를 닮은 아이들의 몫이 되겠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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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