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체설이 나도는 청와대 정책실장은 자신이 주도해온 ‘소득주도성장’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여기에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나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을 접할 때마다 그 이름이 궁금했었다. ‘혁신성장’도 그랬다. 알고 보니 각기 분배와 성장을 중시하는 정책이란다. 알고 나니 더 궁금해졌다. ‘분배’라는 말은 왜 빠졌을까? ‘성장’ 대신 왜 굳이 ‘혁신’성장이란 말을 만들었을까? 소득주도성장에서 성장은 여전히 목표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누구의 소득주도인지 특정되지 않음으로써 소득불균형 문제와 분배의 중요성은 부각되지 않는다. 혁신성장은 규제혁신을 통한 성장이고 규제혁신은 규제철폐나 완화를 뜻하니, 혁신성장은 기존의 성장을 에두르는 말일 뿐이다. 분배를 선명히 내세웠을 때 오는 부담과 과거의 성장 위주 경제정책을 답습한다는 인상을 피하고 싶었을까? 분배를 강조했지만 여전히 성장 패러다임의 철옹성에 갇혀 있는 현 정권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의 실체를 드러낼 수도, 감출 수도 있다. 정명(正名),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는 일이 중요한 까닭이다. 지난여름 폭염의 주범으로 기후변화가 주목을 받았지만, 이 이름 자체는 문제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변화 자체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그러나 기후변화를 “지구적 규모의 폭력”으로 보게 되면 논의할 “우선순위와 가치”가 분명해진다(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누가 얼마만큼 가해자이고 누가 일차적인 피해자인지 따지고 가해자에게 합당한 책임을 묻게 된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 특히 약자에 대한 폭력을 막는 정의와 평화와 연대의 활동이 된다.

최근 임시저장소의 포화문제로 ‘사용후핵연료’가 다시 현안으로 떠올랐지만, 이 이름도 문제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사용하고 난 연탄은 ‘사용후연탄’이 아니라 연탄재라고 한다. 연탄 ‘재’는 쓰고 난 폐기물이고 치워야 할 쓰레기다. 그러나 사용후‘핵연료’는 어쩐지 연료라는 인상을 풍긴다. 재처리와 연결되면 더욱 그렇다. 이런 면에선 ‘고준위핵폐기물’이 더 적절한 표현이지만, 거기에 내재된 치명적 위험을 알려주기엔 여전히 부족한 이름이다. 차라리 ‘죽음의 재’, ‘끌 수 없는 불’이 실체의 정곡을 찌르는 이름이다.

사용후핵연료는 핵반응을 일으키며 엄청난 열을 내뿜는다. 그래서 적어도 10년을 저장수조에서 식힌 후 방사성물질이 누출되지 않도록 10만년 이상을 세상에서 분리, 차폐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안전한 곳에 견고한 영구처분장을 짓는다 해도 완벽한 분리와 차폐는 모든 게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선 애당초 불가능한 요구다. 더구나 10만년은 현생인류의 전 역사를 훌쩍 뛰어넘는, 길어야 100년을 사는 우리 인간이 가늠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기간이다.

고준위핵폐기물 처분을 제대로 논의하려면 진정한 반성이 앞서야 한다. 대책이 없음을 알면서도 죽음의 핵폐기물을 만들어온 우리의 행위가 전기 생산이란 명분으로 윤리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가? 진정한 반성과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며칠 전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가 내놓은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기초로 원전기술력과 원전산업의 국제경쟁력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는 합의에서는 반성과 변화의 기미라곤 찾아볼 수 없다. 핵발전이 여전히 현 정부의 에너지정책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탈핵을 선언하고도 수구정당과 핵산업계의 공세에 밀려 머뭇거리는 모습은 분배를 강조하면서도 기존의 성장 정책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빼닮았다. 그러나 기후변화와 핵발전의 실체를 제대로 본다면, 우리가 좇아야 할 “우선순위와 가치”는 경제성이 아니라 안전과 지속가능성이 분명하다. 첫 마음이 맞다. 주권자들은 그 첫 마음을 보고 권력을 위임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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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