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도 더 된 기억이다. 나의 첫 해외여행은 1995년 8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인도네시아 독립 50주년 기념 국제청년행사였다. 한국대학생 20여명이 초청됐는데 운좋게 거기에 포함됐다. 우리 일행은 행사참여를 위해 자카르타에서 지방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일행 중 한 명이 비자를 분실했다. 아마도 날치기를 당했던 모양이다. 다른 일행들은 떠나고 룸메이트였던 내가 그와 함께 남았다. 그런데 뭘 아나. 낯선 이국땅. 첫 해외여행.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데 누군가가 말을 붙였다. “무슨 일이 있나?”

경상도 사투리가 진했던 40대 중반의 아저씨는 자카르타에서 신발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우리가 쩔쩔매는 모습이 애처로웠나 보다. “걱정하지 마라, 한국 대사관 가서 얘기하면 새 비자 금방 내줄끼다. 니들 돈없재?” 그는 택시를 잡은 뒤 불쑥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를 건네줬다. 당시 돈으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연락처 가르쳐 주시면 돈을 보내드리겠다”고 말하자 그는 “씰데없는 소리 한다”며 택시문을 닫았다.

그제서야 긴장이 탁 풀리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호의가 너무 고마워서였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어른’이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한 아파트에 ‘5평형 빈민아파트 신축건’이라는 제목의 안내문이 붙었다. 서울시가 짓는 청년임대주택을 이들은 ‘빈민아파트’라 불렀다. 들리는 얘기로 주민의 70%가량이 여기에 동의한단다. 강동구 천호역 인근에 들어서는 청년임대주택도 반대가 심하다. 주민들은 여러 이유를 댄다. 지반이 약하고, 교통혼잡이 우려되고, 원래 다른 용도로 쓸 땅이었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기다. 속내는 ‘집값’ 아닌가.

서울시내 17평짜리 방 두 개 빌라 전세가 2억원이 넘는다. 지방 아파트 한 채 가격이다. 금수저가 아니라면 청년이 이런 돈이 있을 리 없다. 이들이 빈민인가.

대구 경북대 인근에는 ‘경북대기숙사건립반대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경북대가 짓고 있는 재학생 기숙사 건설을 반대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인근에 원룸 공실이 4000여실에 달하는데 민자기숙사가 건립되면 공실이 6000~7000개는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근주민의 생계를 무시하고 대형건설사 배만 불리는 기숙사’라는 게 이들의 반대 이유지만 역시 진짜 이유는 아니다. 서울의 한양대, 고려대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해 상반기 서울시내 대학가 원룸 평균 임대료는 보증금 1378만원에 월세 49만원에 달했다. 청년이 돈주머니인가.

강원 양구, 경기 연천 등 접경지역에서는 상인들이 군 위수지역 폐지를 결사반대하고 있다. 장병들이 외출·외박 때 위수지역을 벗어나게 되면 상권이 죽는단다. 병사들과 부모들은 “위수지역 내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 불만이다. 택시비도, PC방 이용료도 서울보다 비싸다고 장병들은 주장한다. 나라 지키러 군에 간 청년장병들이 봉인가.

이 정도면 어른들의 ‘갑질’이라 부를 만하다. 내 재산권, 내 생존권을 위해 청년들의 등골을 빼먹겠다는 것 아닌가. 부끄럽고, 참담하다. 따지고 보면 내 아들이거나 한 다리 건너 내 조카일 텐데 말이다. 자기욕심만 채우는 어른들이 존경을 받을 리 없다. 기초연금 증액은 찬성하면서 청년수당 도입은 반대한다. 젊음이 죄인가.

하지만 반전이 있다. 20년쯤 뒤 노인이 된 지금의 기성세대는 결국 지금의 청년들에게 기대야 한다. 그때 가서 ‘우리 좀 부양하라’며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설사 지금의 청년세대들이 돕고 싶어도 돕지 못할 수도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지금 갈라 버린다면 말이다. 청년을 윽박지르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단언컨대 시간은 기성세대의 편이 아니다. 청년의 편이다.

<박병률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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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