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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 토머스의 시를 사랑한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고 노래하는 시다.

밥 딜런이 자신의 예술적 아버지로 삼을 정도로 사랑했던 시인 딜런 토머스가 1951년, 임종을 앞둔 부친을 위해 썼던 시다. 시인이 처한 그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 때문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꺼져감에 분노하라고 노래하는 격렬한 시정 때문일까?

나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에서 종종 자살하는 친구들 소식을 들어야만 하는 이 땅의 청춘들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그 시를 떠올렸다.

그렇다. 우리는 분노해야만 한다. 젊은 청년들에게 꿈과 미래를 빼앗고 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 나라의 암담한 현실에 대해서 분노해야만 한다.

물론 분노의 방식이 문제이다. 어떻게 분노할 것인가? 목표와 목적이 불분명한 분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폭발하는 분노조절장애나 다름이 없다.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이슬람국가(IS)식 테러도 일종의 분노의 표출일 테니까.

나는 일단 책을 선택했다. ‘한국 자본주의 Ⅱ,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의 불평등’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신작 <왜 분노해야 하는가>다.

장 교수는 먼저 ‘왜’에 방점을 찍는다. ‘재벌 100대 기업이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4%에 불과한 반면 중소기업은 무려 72%이다. 그런데 중소기업 임금은 대기업의 절반 수준이다. 1980년대 중소기업 임금이 대기업의 90%가 넘는 수준일 정도로 격차가 적었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임금 격차가 점점 확대된 거다. 그뿐인가? 예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런데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은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고용형태(일본과 한국에만 있는)를 만들어 낮은 임금을 지급할뿐더러 임의로 해고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은 고용을 창출하지 않는 초대기업이 순이익을 독차지하고 대다수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됐다.’ 그게 내가 읽은 ‘왜’의 핵심이다.



요즘 유행하는 ‘수저론’은 사실상 핵심을 흐리는 문제인 셈이다. 200년 이상 부를 축적한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지난 30년간의 소득 불평등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거다. 가진 게 별로 없어도 일한 만큼 제대로 분배된다면, 고작 질투심 때문에 자살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거다. 또한 장 교수는 불평등의 원인이 재산의 격차가 아니라 소득의 격차이므로 당연히 그 해법도 기존 논의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복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애초부터 잘못 작동하고 있는 원천적 분배를 두고 사후에 교정하는 재분배만으로는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맞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개봉한 노르웨이 영화 <사라짐의 순서: 지옥행 제설차>에서 듣고 한참을 웃은 대사가 생각난다.

“복지? 그런 건 노르웨이처럼 추운 나라에서 필요한 거고.” 우리나라처럼 애초부터 잘못 분배되고 있는 곳에서는 잘못된 걸 고치는 게 먼저인 거다.

좀 더 정확히 가계에 노동소득으로 분배되어야 할 몫을 재벌 대기업이 분배하지 않고 자기 곳간에 쌓아두고, 중소기업에 돌아가야 할 이익을 재벌 대기업이 차지하는 고용구조와 기업구조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복지 예산을 늘리는 재분배 확대만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말인가? 그게 이 책의 두 번째 방점이다. 재벌 대기업이 탐욕에 눈이 멀어 앞장서서 불평등한 나라를 만들었고 기성세대는 그걸 방치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없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맡겨두면 이 세상은 더욱더 암담해질 것이다. 미안하지만 청년세대가 나서야 한다는 게 장 교수의 결론이다. 다행스럽게도 장 교수가 청년 세대에게 제안하는 실천적 방안은 매우 구체적이다.

예컨대 인턴이나 비정규직 제도, 알바 최저임금, 주거비, 학력 차별처럼 20대가 ‘잉여’가 되고 30대가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가 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을 제기하여 사회적 이슈로 만들고, 자기 세대의 이익을 대표하는 시민단체 혹은 조직적 연대와 함께 기업과 정당을 압박하여 불평등이 개선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

장 교수는 단언한다. 한국 정치가 아무리 혐오스러워도 결국은 정치라고. ‘청년세대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 참여가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다. 그런 시시한 위안에 침을 뱉어야 한다.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해야 한다. 스스로 잘못된 세상을 고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청년들의 표를 얻고 싶은 정치인들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 그게 청춘이고 희망이라는 확신으로 장하성 교수의 책을 2권, 3권, 10권, 100권 사서 이 땅의 젊은이에게 강권하리라.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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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