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격변기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로드맵이 세워지고, 여성과 지역 인재 할당 목표가 화두가 됐다. 흙수저나 낙오자는 따라붙기 힘든 대한민국 일자리에 강력한 외과수술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하이라이트는 ‘블라인드 바람’이다. 입사지원서에 출신지역과 학교, 가족관계, 신체조건, 사진도 담지 못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7월 공공기관 332곳에서, 8월 지방공기업 149곳에서, 9월 지방 출자·출연기관 663곳에서 도입된다. ‘철밥통’이라 손가락질하고, ‘신이 숨겨둔 직장’이라 선망하던 1만개 공공 일자리 채용 시장에 차별과 편견을 덮는 가림막이 내려진다.

‘블라인드’ 네 글자를 쳐봤다. 포털 검색창엔 무겁고 가벼운 얘기들이 엇갈린다. 지난 2월 내한공연을 한 ‘클라리넷의 여제’ 자비네 마이어는 1982년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단원이 됐다. 남자들의 질시 속에 그가 지휘자 카라얀이 내민 손을 잡고 금녀의 벽을 깬 힘은 두 차례의 ‘블라인드 오디션’ 우승이었다. 가면이 재밌기로는 얼굴 가리고 소리로만 진검승부하는 TV 속 <복면가왕>도 보인다. 누군가는 금기를 깨고, 누군가는 선입견 없이 실력을 겨루는 블라인드 경연은 동서고금에 두루 있었다.

아우성이다. 블라인드 채용 공고가 붙기도 전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엔 ‘눈먼 채용’이고 ‘역차별’이라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블라인드 지원서에 빠지는 대학과 학점도 노력을 쏟은 결과이고, 직무 자격증을 따려는 스펙 경쟁은 계속될 거라는 논리다. 반대 목소리는 여론조사 20%를 갓 넘을 뿐이다.

되묻게 된다. 금수저와 흙수저는 제 갈 길로 가고, 한번 뒤처진 사람은 일자리 사다리에 다시 올라서기 어려운 세상이다. 2015년 10월부터 5개월간 경향신문 ‘부들부들 청년’ 특별취재팀이 전국에서 만나본 1500여명의 청년 속엔 정규직 꿈을 포기한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대로가 좋은가. 정부 정책이 먼저 챙기는 ‘인서울’ 대학생은 청년의 10%도 안된다. 나머지 90%는 어디에 있는가.

뉴스를 가릴 때 쓰는 6하원칙은 이 길목에서도 긴요하다. 블라인드 채용의 출발점도 ‘왜’와 ‘지금인지’에, 종착점은 ‘어떻게’에 맞춰볼 때다. 오늘도 수십장의 지원서를 돌리고 면접장엔 서보지도 못하는 이 땅의 청년들이 숱하다. 복면가왕 승부에서 진 사람들이 스튜디오 떠나며 하는 말이 있다. “떨어진 사람도 웃으면서 집에 갈 수 있어 좋아요.” “시원섭섭해요.” 어쨌든 가면을 쓰고 맘껏, 실력껏 경연을 해본 후련함 때문이리라.

미래의 인재를 뽑는데 설렁설렁할 기업은 없다. 구글처럼 수십차례 면접을 보든, 보안회사처럼 나이나 학벌보다 해킹 실력으로 뽑든, 언론사처럼 먼저 필기시험을 치르든, 철도회사처럼 인턴을 거쳐 얼마간의 부적격자를 가리든, 블라인드 채용의 노하우를 찾고 사람을 키우는 것은 회사의 몫이다.

일자리와 교육은 혁명보다 개혁이 더 어렵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제로섬에서 부딪치기 때문이다. 충남 아산에 자율형사립고 삼성고를 만들 때, 삼성의 한 인사는 “우수한 인재들이 수원 밑으로는 안 내려가려 한 속사정도 있다”고 했다. 전문변호사가 없는 대형로펌을 찾아 송사를 맡긴 대기업 고위 인사는 “앞뒤로 네트워크가 좋기 때문”이라며 “솔직히 큰 로펌에 맡기면 져도 내 선택엔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했다. 특권과 인맥을 좇고 공생하는 학벌사회의 단면이다.

모든 것이 당겨졌다. 영어·수학 사교육비를 가장 많이 쓰는 나이가 중1이 된 지 오래됐다. ‘입시 특권학교’가 된 특목고·자사고부터 두드려보려는 전쟁이다. 16세에 인생이 결정되는 나라다. 그렇게 달려간 대학(大學)은 ‘큰 배움터’인가. 내가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스펙만 쌓다 취업 전선에 서는 게 한둘이 아니다.

먼 훗날 돌아보면, 블라인드 채용은 이렇듯 덫에 걸린 학벌사회의 유효한 출구가 될 수도 있다. 출구가 바뀌면 힘만 들고 행복하지 않은 교육도, 학교는 서열 짓고 보는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질 수 있다. 왜 앞서가는 서구의 공동체에선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답형 수업을 하는지, 검색하면 바로 나올 단순 지식은 묻지 않는 오픈북 시험을 보는지, 대학을 숫자나 지역캠퍼스 이름으로만 나누는지 곱씹어볼 일이다.

추운 겨울, 촛불에 모아진 꿈은 상식과 정의가 통하고 기회는 균등한 공동체였다. 초입부터 갑론을박하는 블라인드 채용은 그 몸부림일 수 있다. 서울교육감이 아이디어로 낸 오픈북 시험은 교육의 미래일 수 있다. 길은 끊긴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지나고 보면, 문제는 방향이지 속도가 아니었다. 문제는 늘 디테일에 있었다.

이기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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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