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이면 고드름을 씹어 먹던 열두어 살 무렵의 내가 떠오른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윗방을 쓰고 내가 아랫방을 쓰던 시절이었으니 그 무렵이 맞을 것이다. 그날 정확히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화를 낼 만한 짓을 해서 야단을 맞았고 저녁밥을 먹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다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얻어맞았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내 방으로 쓰던 아랫방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아 달아오른 얼굴이나 식혀보려 마당에 나섰다. 어두운 마당을 서성거리다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들을 보았다. 꽝꽝 얼었으나 손으로 비틀면 마른 명태처럼 쩍쩍 소리를 내며 구부러졌다. 소매 끝에 매달린 작은 고드름을 툭 떼어내 어둠 속으로 던지면 얼어붙은 마당 위를 구르는 맑고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빨랫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옷가지들에 매달린 고드름을 전부 따 어둠 속으로 던졌다. 그중 몇 개는 입에 넣고 씹어 먹기도 했다.

딱딱하게 굳은 옷가지들의 근육을 풀어주듯 구부리고 문지른 뒤 한결 부드러워진 거기에 얼굴을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새물 냄새가 나던 그 옷가지에는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체취도 조금쯤은 남아 있는 듯했다. 머리끝까지 솟았던 열기가 사라지자 몸이 으스스 떨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늬 아버지가 너 미워서 그런 게 아녀. 소리 없이 마당가에 섰던 어머니는 마치 내 물음에 답해주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 말을 툭 내던진 뒤 한밤중에 당신이 늘 하던 일, 아궁이에서 불이 뻗쳐 나오지는 않았는지,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이 얼어 죽지는 않았는지 등을 살피고 뒷간에 들렀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물론 어머니의 그 말에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면 거짓일 테다. 미워서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이런 반발이 왜 생기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얼마 전 촛불집회에서 아내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나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젊은 시인·소설가 137인 선언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당해 재판을 받았다. 그때 아내는 지금의 딸아이를 임신 중이어서 몸과 마음이 힘든 상태였다. 아내는 그때 나를 껴안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아내의 말을 듣자 순식간에 삼십여년 저쪽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어머니는 내가 어떤 말을 듣고 싶었는지 잘 알았다. 억울했던 나는 당장에는 그 말을 귀에 담지 않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에서 위안을 찾았을 테고 겨울날 옷가지들이 빨랫줄에 걸린 채로 낮과 밤을 보내다 어느 결에 다 말라 곱게 개켜 옷장 속에 들어가게 되듯 나의 상심도 스르르 녹아 사라졌을 것이다. 아버지가 직접 그런 말을 해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아버지야 워낙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치고 어머니마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오래도록 속을 끓였을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노라고. 나는 상처받지 않았노라고. 그런데도 내게 미안하다고 말해주어 고맙다고.

대체로 우리는 우리가 했던 일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보다 하지 않았던 일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더 많다. 실수로 그랬든, 고의적으로 그랬든 이미 저질러진 일이 두 사람의 관계를 영영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악화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지 않은 일 탓에 그렇게 될 수는 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한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손을 내밀어야 한다. 박근혜와 그의 정부는 그들이 했던 일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지 않은 일, 아마 그들이 앞으로도 결코 할 생각이 없는 일, 바로 그 일 탓에 국민과 영영 화해 불가능한 상태에서 망각의 늪에 고이 모셔질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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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