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생활기록부를 마감하는 2월이면 학생들은 빈곤한 독서 기록을 채울 문제를 고민한다. 방학 기간 몇 권이라도 읽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교과 학습에 여러 활동, 학원 일정 등을 소화하다 보면 책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상당수 학생들은 인터넷을 뒤지거나 몇 페이지 훑은 뒤 감상을 급조한다. 문제는 성실하게 읽는 학생들에게도 나타난다. 책을 읽어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 얼마 전 학생들에게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 현실 문제를 이해하는 길을 일러준 책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대다수 학생들이 ‘없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다섯 학기 동안 독서 기록을 한 학생들이 세계관이 바뀐 책 하나를 읽지 못한 셈이다. “눈으로 훑은 거죠.” 한 학생의 푸념이었다.

학문 수양에서 독서는 현실 문제를 진단하는 데 필요한 과학적 사고를 함양하는 과정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산업화에 소외된 약자의 고통을 이해하면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의 심각성을 간접적으로 체화하게 된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면 자기보존과 생식에만 골몰하는 이기적인 생명체가 더 큰 이익을 위해 이타성을 발휘하는 황홀한 지적 쾌감에 이른다. 이를 통해 독자는 자율적 공동체라는 인류의 이상에 다가갈 단서를 얻는다. 즉, 좋은 책을 읽어 가치를 내면화한다면 학생들은 진리탐구에 필요한 기본적인 능력을 향상할 뿐 아니라 가치관을 정립해 도덕적 수행능력도 강화할 수 있다. 책 읽기는 양보다 질이다. 정밀하게 읽고, 쟁점을 정리한 후 토론이나 의견 교환을 통해 판단한 다음 글을 쓰는 작업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책을 읽는 방법도, 이를 바탕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도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추천도서 목록이나 서평샘플 등이 학생들이 가진 자료의 전부이다. 책 하나를 모여서 읽고 장시간 토론하거나, 교사의 지도하에 서평을 작성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학생들은 객체로 전락한 책만 손에 쥔 채 끙끙 앓게 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대다수 학생들이 읽다 만 책이 되어버렸다. 저자가 제시한 쟁점들을 혼자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 읽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지적 관심에 기초한 도서 선정에서 독해 방법, 텍스트에 근거한 토론, 현실인식과 대안을 포괄한 글쓰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이를 해결하는 힘을 기르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책 몇 권 추천한 뒤 알아서 읽으라는 무책임한 자세에서 벗어나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맹목적인 자기계발서 등 악서의 남독을 막는 것도 책을 눈으로만 읽는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

그 다음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작품 일부를 낭독하고 서평 작성방법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맞서 전장으로 뛰어든 러시아 여성의 공포와 슬픔, 전우애, 자긍심, 그리고 고독을 짚어나갔다. 책이 인간과 환경을 둘러싼 현실을 인식시킨다는 점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수업이 끝난 뒤 상기된 표정으로 전문을 읽겠다며 저자와 제목을 재확인한 학생도 있었다. 책은 눈으로만 읽어서는 안된다. 내 모든 감각을 동원해 이해하고 타인의 육성을 통해 울림을 얻은 뒤, 자기 견해와 만난 지점에서 치열하게 싸워나간 흔적을 기록해야 종이 위에 찍힌 잉크가 영혼으로 흘러든다. 이렇게 읽은 책은 마음의 양식이 되어 평생 그 사람을 지탱해줄 것이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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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