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면 서랍 속 여권을 종종 꺼내본다. 올여름 몽골을 방문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 머무는 이주 외국인들의 법률지원 활동을 주로 하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올여름 그동안 이 단체에서 도움을 받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이주민들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오래간만의 해외여행이기도 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들을 그들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은 팍팍한 일상의 작은 활력소가 된다.

빳빳한 여권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첫 장 중앙에 커다랗게 찍힌 ‘대한민국’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국적란의 ‘REPUBLIC OF KOREA’라는 영문자도 낯설지 않았다. 두 단어는 낯설어 보이는 증명사진 속 나의 모습보다 더 익숙했다. 여권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출신지뿐만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작지만 강력한 기호이다.

그러나 세상엔 이 작은 여권도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만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와 관련 없는, 멀리 떨어진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 그곳에 지금은 역사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선’ 국적자로 분류된 동포들이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과거의 나라,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기 전 하나인 한반도를 영토로 삼았던 나라의 국민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고집하는 사람들, 바로 ‘자이니치’로 불리는 재일(在日)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은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이나 징병이 되거나, 또는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과 그 후손들 가운데 해방 이후 일본국적으로 귀화하지 않은 동포들을 말한다.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일본 내 조선인들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 ‘외국인’으로 분류됐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외국인으로 분류하면서 편의상 ‘조선적’(조선국적자)으로 표시하여 등록했다. 이것이 재일조선인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한반도에는 남한과 북한이라는 분단된 두 개의 나라가 생겨났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남한이나 북한 국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들은 남한과 북한 중에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여전히 조선적을 고집하고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남북의 한쪽 국민이라는 ‘국적’이 이들에겐 하나의 민족을 두 개로 단절시킨 ‘분단 국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전히 하나로 통일된 나라를 꿈꾸고 있다. 2015년 12월 기준으로 조선적 재일동포는 약 3만4000명에 이른다.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에 살면서 수많은 차별과 적대를 경험한다. 우리나라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정부는 재일조선인을 재외동포가 아닌 무국적자로 분류하고, 외국인보다 엄격한 입국심사를 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임시여권인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여행증명서 발급률이 급감했다. 주일 한국영사관은 한국을 방문하고자 하는 재일조선인들에게 한국국적 선택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재일조선인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여행증명서 발급이 거절되었다. 통일된 조국을 소망하며 차별과 적대를 인내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우리 정부는 인내와 포용이 아닌 선별적 포섭과 배제로 답했다.

우리 헌법은 통일의 지향을 선언하고, 대통령에게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은 차별과 배제의 공포 속에서도 자신의 삶으로 통일된 조국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재일조선인의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하는 것이 첫 단추가 되어야 한다.

조영관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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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