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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남성 시민’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나 역시 정권교체를 바라지만, 여성과 남성은 그 방법이 다른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나체 합성 그림이 포함된 ‘표창원 의원과 함께하는 ‘표현의 자유를 향한 예술가들의 풍자 연대’ 전시회’, ‘곧, BYE! 展’은 철지난 뉴스가 아니다. 이 사건은 인류 5000년 역사를 요약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반복될 이슈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그림은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올랭피아’를 베꼈다. 이 작품은 지난 1월20일부터 전시되었다가 논란으로 철거된 상태다. 마네는 웬만한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풀밭 위의 점심’ ‘피리 부는 소년’으로 유명한 인상파 화가다. 올랭피아는 당시 매춘 여성들의 흔한 이름이었다.       

이 그림에 대한 내 해석은 ‘흑인 하녀’와 주인공인 ‘창녀’가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선이다. 다시 말해, 흑인 하녀는 최순실씨가 아니고 올랭피아의 당당한 눈동자와 박 대통령의 눈빛은 한참 거리가 있다. 패러디는 원작을 충실히 이해했을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패러디가 아니다. 작가가 가져온 것은 여성의 벗은 몸뿐이다.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 2탄 작품 ‘블랙’. 정지윤 기자

작가는 “박 정권에 이 정도 저항도 못하냐”라고 항변했지만 천만의 말씀, 이것은 저항이 아니라 권력 행위이며 본인이 그토록 적대하는 세력에 바친 ‘자살골’이다. 이 그림은 현 정권에 분노하는 ‘시민’의 시각이 아니라 ‘남성’의 입장에서 재현된 것이다. “표현의 자유”나 “국회의원의 품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작가의 인권 수준만 보여준 꼴이다.

이 그림은 ‘비상시국’ 때마다 등장하는 ‘일상적인’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전형이다. 적절한 비교는 아니지만, 전두환씨가 대머리라고 해서 ‘대머리 남성’ 전체의 인권이 짓밟혀서는 안되듯이, 혹은 강남역 살인 사건의 범인이 전직 신학생이라고 해서 모든 신학생이 살인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여성이 내게 좋은 질문을 했다. 그 그림의 작가가 여성이었다면? 마찬가지다. 여기서 문제는 누가 그렸는가가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사회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벗은 몸은 성별 중립적이지 않다. 남성에게 여성의 나체는 쾌락이다. 그들은 돈을 주고 구매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험은 다르다. 남성의 성기 노출이 범죄인 이유다.

그림은 표창원 의원이 그린 것도 아니고 그는 작품 선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표 의원의 부인이다. 박사모가 그의 부인을 박 대통령처럼 그려놨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하이라이트’다. 나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표 의원이 박 대통령의 누드화를 그렸다 해도, 복수를 하려면 표 의원의 벗은 몸을 그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의 부인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박사모의 대응이 가장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사모는 남성연대라는 방식으로 그 어려운, ‘여야 대연정’을 실현했다.

상대방이 ‘자기 여자’의 누드화를 제작하고 전시해서 모욕을 느꼈다면, 남성 작가끼리 벗기면 된다. 왜 ‘상대방의 여성’을 벗기는가. 약자의 몸은 강자의 전쟁터다.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듯이,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었듯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전쟁터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에서, 남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중학생(효순·미선) 사건의 반복이다. 이 참사는 예견된 것이었다. 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컸기 때문에 탱크 위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은 계속 민원을 제기했으나 묵살당했고 결국 어린 학생이 희생되었다. 축구에 열광했던 시민(남성)들은 갑자기 죄의식에 사로잡혀, 촛불집회를 열었고 ‘Fucking USA(퍼킹 유에스에이)’를 합창했다.

왜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에게 저항하지 않고 미국을 여성화하면서 미국 여성을 강간하자고 외치는 것일까. 결국 남성은 국적을 불문하여 폭력의 주체가 되고 여성은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된다. 한국 남성의 미국 남성에 대한 동일시 욕망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온 문화다. 남정현의 <분지(糞地)>부터 ‘반미 에로’ 영화 <태극기를 꽂으며>까지. 동시에 수천년 동안 반복되어온 전쟁 시 상대편 여성에 대한 성폭력부터 일상의 성매매까지 여성의 몸이 사용되어온 원리다. ‘군 위안부’를 인권 문제로 보지 않고 “우리도 일본 여성을 강간하자”는 논리가 가장 가까운 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입장은 같지 않다. 어떤 이들은 시민보다 남성 정체성이 더 강하다. 어떤 이들은 정권교체를, 어떤 이들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 서두에 썼듯이 나는 이 글을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남성들이 읽었으면 한다. 범야권은 이번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해야 한다. ‘여성’ 대통령 누드화는 여성과 상식 있는 시민에게 불쾌감을 줄 뿐이다.

‘한남(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표현)’은 국민, 시민, 민중이든 자신을 보편적 인간으로 생각한다. 성찰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남들이 가장 오해하는 단어가 “저항”이다. 일단, 더러운 잠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이후 깨달음의 고통이 있겠지만 언제까지 ‘한남’으로 살면서 나라를 망칠 것인가. 정권교체를 이루고 최순실 무리를 뿌리 뽑아야 풍자다. ‘태극기집회’ 세력과 여성의 벗은 몸을 공유하여, 야권을 남성과 여성으로 분열시키는 것은 저항은 아니라 ‘이적’ 행위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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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