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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글날 아침, 논산시 건강관리센터 마당에 500여명이 모여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논산 시민들도 있었고 대전, 서울, 부산 등에서 온 독자들도 많았다. 논산의 아름다운 곳곳을 ‘작가와 독자’가 함께 걷는 행사 “소풍”의 첫날이었다. 내가 제안해 시작한 행사였다. 작년엔 5일을 함께 걸었는데 올해는 4일로 줄였다. 연두색 들은 정결하기 이를 데 없었고 계룡산 연봉들은 잡힐 듯 가까웠다. 인사말에서 나는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자’고 제안했다.

반야산 솔숲을 종단해 ‘은진미륵’의 관촉사에서 미륵세상의 의미를 되새기고, 성덕리 너른 들을 지나 계백의 혼이 숨 쉬는 탑정호에 도착하자 점심시간이었다. 제공된 도시락을 먹고 나면 호숫가를 따라 나의 집필실 마당까지 내처 걸을 터였다. 산과 들과 호수가 절묘하게 배합된 어여쁜 우리 땅이었다. 사람들은 모인 듯 흩어진 듯 걸었다. 낯선 사람끼리 손잡고 노래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이들까지 걸을수록 오히려 표정이 더욱 환해지는 게 참 보기 좋았다. 몇 백 미터 떨어진 학교에 등교할 때에도 부모들이 자동차로 데려다주는 세상이 아닌가. 애향심은 기실 고향땅을 걸었던 발바닥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논산에 내려가 터를 잡은 다음의 일이었다. 관념으로서의 그것보다 발바닥 감각에 축적된 애향심이 훨씬 힘 있다는 것을 그날 함께 걸었던 어린이들도 오랜 세월 후 선연히 느낄 것이었다.

'와초 박범신 문학제'에서 독자들과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는 박범신 작가. 와초 문학제는 그의 집필관이 있는 논산에서 2년째 독자와 만나고 함께 걷고 노래하는 축제다. (출처 : 경향DB)


나는 거의 매년 히말라야 트래킹을 다녀온다. 그때마다 내가 걷는 원칙은 그것,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는다’이다. 등산엔 보통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높이 오르는 데 가치의 방점을 찍는 등정주의 방법이 있고,(힐러리경이 에베레스트를 오른 뒤 산악계에선 거의 사라진 이 전근대적 등반방법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 홀로 높이 오르면 그만이라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출세지상주의적 삶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으로 남아있다.) 고유한 길을 선택해 타인과 장비의 도움을 최소화, 오로지 자신의 감각과 에너지에 의지하는 등로주의 방법이 있다. 젊은 산악인 박정헌-최강식의 ‘촐라체’ 등반과정을 모티브로 삼아 쓴 내 소설 “촐라체”는 바로 등로주의 등반을 지향하는 산악인들에게 바치는 나의 오마주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기술등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히말라야에 가면 빙하가 없는 곳을 따라 그냥 걸을 뿐이다. 이런 트래킹을 보통 ‘존재등반’이라 부른다.

트래킹을 시작하고 사나흘까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씩씩하다. 기분이 고양되어 낯선 사람들에게도 “나마스테!” “나마스테!” 네팔말로 소리쳐 인사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때까진 무리지어 있으므로 낯선 이들과 구분되는 ‘집단’의 이미지를 물씬 풍긴다. 단체 트래킹이 주를 이루는 우리나라 트래커들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그러나 4~5일쯤 지나고 해발 3000~4000m를 넘어가면 큰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나마스테!”도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 된다. 동행자들도 때로 멀리 떨어지고, 그래서 혼자 침묵으로 걷는 시간이 길어진다. 문명사회에서 가졌던 욕망들이 사실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거나, 사소한 일들에 대한 통절한 후회를 난데없이 만나며, 오래전 어느 길섶에 버린 첫 꿈 첫사랑 등이 현실감을 갖고 눈앞에 닥친다. 가끔은 너무 외로워 앞뒤 떨어져 걷고 있는 동행들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한다. “아, 나는 지금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구나!”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있다. 내가 쓰러질 때 그들이 달려와 줄 거라는 상상은 놀라운 힘을 준다. ‘집단’이라는 느낌은 해체되고 진실로 ‘함께’ 있다는 위로만 남는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면서, 그러나 그 순간 오직 고유한 자신의 걸음새에서 주체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경험이다.

우리에겐 본래 등반개념이 없었다. 높은 산을 오로지 정복해야 한다면 ‘집단’을 이루어 효용성 중심으로 전략을 짜는 것이 미상불 나쁘지 않을 것이지만, 정복하려 하지 않는다면 개별성을 존중하고 그러면서 만일의 경우 서로 도울 수 있는 거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집단은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긴다. 생산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로 온 나라 사람들이 무장해온 지난 60여년, 우리가 배워 이제 거의 내면화 과정에까지 도달한 것은 ‘집단’이고 우리가 송두리째 유기하거나 잃어버린 것은 ‘함께’라는 생각이다.

세월호를 보라. 도망치는 선원들의 집단, 온당한 권리가 없는데도 눈 맞추고 배 맞추어 과적을 하도록 세월호에 ‘빨대’를 박은 기득권자들의 집단, 죽고 없는 한 종교단체 수장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해 책임을 모면하려는 집단, 집단, 집단들뿐이다. 집단이 아니라 ‘함께’ 살고자 했다면 세월호의 사람들 대부분을 살려냈을 게 틀림없다. 집단은 이익에 따라 끝없이 패를 나누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만 정상에 오르려고 한다. 개별성은 존중되지 않는다. 개별성을 존중하지 않으므로 진실한 ‘함께’도 없고 참된 위로도 얻을 수 없다. 이익에 따라 사람들을 집단화하는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그룹이 나라를 망친다. 국가주의조차 그렇다.

오래 함께 걷다 보면 동행자들로부터 내 존재가 얼마큼 떨어져 있으며 어떻게 함께 있는지 그 거리를 잴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이나 집단이데올로기에 편입돼 있으면 일시적인 안정감을 얻을지 몰라도 지속적인 안정을 얻지 못한다. 높이 오르는 게 장땡이 아니라 낮든 높든 내 봉우리를 성실히 가꾸어 그 고유성으로 이웃과 함께 있고자 하는 사회가 민주사회다. 나를 가두려는 수많은 ‘집단’으로부터 조용히 ‘독립만세’를 부르면 새 삶의 지평이 보일 거라고 믿는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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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