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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1.01 [정유진의 사이시옷]성폭력의 목격자들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스캔들로 촉발된 ‘#미투(Me Too)’ 캠페인에 동참한 여성들의 이름을 보며 다시 한번 실감했다.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라는 후천적 권력도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선천적 약점을 상쇄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와인스타인에게 성추행당했을 때 귀네스 팰트로는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영화배우였다. 현재 미국 민주당 차기 대선주자 중 하나로 꼽히는 엘리자베스 워런조차 대학교수 시절 동료 교수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심지어 네덜란드의 한 상원의원은 정치를 막 시작했을 무렵 장관(!)에게 성추행당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이들마저 이럴진대, 하물며 후천적 권력은커녕 선천적 약점에 후천적 약점까지 덤으로 얹힌 대다수 여성들은 더 말해 무엇할까.

성폭력을 당할 위험이 비무장지대의 지뢰밭만큼이나 도처에 널려 있는 세상이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확률 못지않게 성폭력의 목격자가 될 확률이 높다. 성폭력이 제3자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성폭력은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해 어쩌다 저지르는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내면화된 습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 습성은 수위를 조금씩 달리할 뿐, 타인 앞에서도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와인스타인은 자그마치 30년 동안 성희롱하고, 성추행하고, 성폭행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할리우드의 동료배우와 제작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꿈에도 몰랐다. 알았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란 글을 잇달아 올리며 분노를 쏟아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30년 동안 아무것도 몰랐을까. 그리고 ‘알았다면’ 과연 가만있지 않았을까. 와인스타인과 여러 차례 작업했던 각본가 스콧 로젠버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장문의 고백을 남기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하는 할리우드의 위선을 비판했다.

“이건 명확히 하고 가자. 모두가 X나 잘 알고 있었다. 성폭행까지는 몰라도, 그의 게걸스러운 탐욕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나는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당신들을 봤으니까. 당신들과 그것(와인스타인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바로 당신들. 유명 제작자들, 감독들, 에이전트들, 투자자들, 남자 배우들, 여자 배우들, 모델들, 언론인들, 정치인들! 모두가 X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저 하비와 좋은 시간을 즐겼지. 하비는 나의 형편없는 각본에도 거액을 투자해줬다. 나는 (하비와 일하면서 생긴) 이득을 취했고, 대신 입을 닫았다. 결국 나도 공범자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진정으로 미안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성폭력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개입해 말릴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실제 그런 일이 닥쳤을 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조지 B 커닝햄 텍사스 A&M 대학 교수는 2012년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실험을 했다. 한 그룹은 성폭력 상황이 담긴 시나리오를 읽기만 하게 했고, 다른 그룹은 성폭력 상황을 실제로 목격하게 했다.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들 상당수는 ‘이런 일이 실제 벌어진다면 직접 개입해 말리겠다’고 답했지만, 그 상황을 목격한 그룹에서 성폭력을 중단시키기 위해 실제 행동을 취한 사람들의 숫자는 훨씬 적었다.

그래서 미국 등 해외의 초·중등학교, 대학교, 사회단체 등에는 잠재적 성폭력 목격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격자 개입 프로그램(bystander intervention program)’이란 것도 존재한다. ‘저 정도는 친밀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여자가 반항하지 않는 걸로 봐서 서로 즐기는 것 아닐까.’ 개입을 망설이는 목격자들을 위해 구체적인 개입 기준과 요령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년 전 오하이오 대학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는데도 목격자들이 아무도 말리지 않아 충격을 안긴 바 있다. 당시 목격자들은 “남녀가 둘 다 술에 취한 듯 보였고, 여성이 반항하지 않아 서로 즐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답했다. ‘목격자 개입 프로그램’은 “여성이 반항의사를 표하지 않더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명료한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반드시 목격자가 개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본인의 신변까지 위협받을 가능성이 큰 경우엔 경찰에 신고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접근해 남성에게 길을 묻는 방식으로 주의를 흐트러뜨린다는 등 구체적인 개입 요령도 훈련시킨다.

물론 목격자가 나섰다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실제 한국에서는 성희롱당한 동료를 위해 증언을 해줬다가 사측으로부터 노골적인 보복징계를 받은 사례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럴 때는 그 목격자의 불이익을 목격한 사람들이 또다시 나서면 되지 않을까. 침묵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목격자들의 개입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목격자의 몫이니까.

<정유진 토요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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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