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없이 우리는 제72주년 8·15 광복절을 기념했다. 기념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행위이다. 기념일 제정, 기념관 설립, 갖가지 기념행사에는 개인의 사적기억을 넘어 사회집단으로 기억을 공유하겠다는 뜻이 녹아 있다. 망각에 맞서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보다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기억하려는 행위는 그저 과거를 떠올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과거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역사인식과 맞물려 있어서다. 이는 역사의 서술, 역사적 진실 문제와도 직결된다. 따라서 과거를 어떻게 인식·기억하느냐 하는 한 사회의 집단기억은 사회적 의미와 더불어 정치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기억하려는 행위의 중요성, 엄중함은 여기에서 나온다.

지배권력은 그 속성상 기억, 특히 집단기억에 내재한 정치성을 간파해낸다. 통치와 지배에 유리한 집단기억을 만들려고 한다. 다양한 선전선동 활동을 동원하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반면 지배권력이 원치 않는 기억, 기억하려는 행위는 철저하게 배제시킨다. 배제를 넘어 물리적 힘을 통해 망각을 강요한다.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라고 작가 밀란 쿤데라는 통찰했다. 기억담론이 대두되면서 역사학계에서도 ‘기억과 망각 사이의 투쟁이 역사’라는 주장이 나온다.

기억투쟁은 망각에 대항해 기억을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불러내는 행위이다. 지배권력의 망각 시도에 맞서 배제된 기억들을 소환함으로써 묻혀진 역사적 진실을 드러낸다.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실제 홀로코스트, 과테말라 내전의 진상이 규명되고 진실이 밝혀진 것은 국제적 기억투쟁의 산물이다. 홀로코스트는 지금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기억되기가 쉽지 않았다. 나치는 자신들의 만행 관련 증거물을 없애는 데 혈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불러낸 기억 조각들, 그들의 기억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종과 지역을 뛰어넘어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귀하게 여긴 많은 ‘기억투쟁가’들이다.

마야 문명의 발상지인 과테말라는 1960년대부터 30여년 동안 군사정부와 이에 맞선 반군의 충돌로 수십만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하는 참혹한 내전을 겪었다. 내전 후 정부군·반군의 민간인 학살, 인권유린을 조사하기 위한 ‘진실위원회’(유엔 역사규명위원회)가 구성됐다. 진실위원회는 ‘과테말라, 침묵의 기억들’이란 3600쪽의 방대한 조사보고서를 펴내 민간인 희생의 진상을 규명해냈다. ‘과테말라, 침묵의 기억들’도 수만명에 이르는 주민들의 끈질긴 기억투쟁으로 가능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기억투쟁은 선명하다. 한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은 폭도였고, 민주화운동은 반란이었다. 지배권력은 힘으로, 선전으로 진실을 은폐한 집단기억을 만들고 또 강요했다.

제주 4·3사건도 마찬가지다. 지배권력은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진실이 드러나지 않기를 원했고, 4·3 기억은 망각됐다. 하지만 기억투쟁은 결국 사건 발생 50여년 만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이끌어냈다.

기억투쟁은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다. 지난 지배권력은 “그만 잊으라”고 했다. 지배권력에 동조한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냉소한다. 하지만 유가족과 많은 시민들이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고 외치고 있다. 2기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이 주목된다.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홀로코스트 등은 기억투쟁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기억투쟁이 얼마나 긴 시간과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도 말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을 불러내 현재화시키는 기억투쟁으로 역사를 다시 썼다.

지난 8·15 광복절 기념 행위에서 기억투쟁과 관련한 의미 있는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억을 기억하려는 상징물 ‘평화의 소녀상’이 11개 더 세워진 것이다. 2011년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시작으로 이제 국내에 51개, 해외에 7개가 서 있다.

그 숫자보다 ‘소녀상의 진화’가 돋보인다. 설립 주체가 다양해지고, 주체들의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양식과 상징성을 녹여낸 소녀상들이 조성됐다. 소녀상은 할머니들의 쓰라린 기억을 불러내는 매개체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반성 없는 일본의 반인권적 처사를 비판하는 의지의 결과물이다. 무엇보다 광복 후 지금까지 진행 중인 기억투쟁의 생생한 상징물이다. 그런 소녀상의 진화는 결국 우리의 기억투쟁 승리를 담보하는 듯하다.

<도재기 국제·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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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제69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관계와 국내 현안, 한·일관계 등에 대해 언급했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국민에게 국정운영 방향을 제시하고 북한과 일본 등 주변국에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기회로 활용돼 왔다. 이번 경축사에서도 박 대통령은 대혁신과 경제활성화를 국정 기조로 삼을 것을 밝히고 남북이 서로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작은 통로로 환경·문화 분야의 협력사업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꼬일 대로 꼬인 지금의 정국 상황과 국정 현안, 남북관계 등을 풀어나가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우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성찰 의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 실망스럽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올해 들어 잇따라 발생한 사건·사고’의 하나로 지칭하면서 “오랜 기간 쌓이고 방치되어 왔던 잘못된 관행과 적폐를 바로잡는 대혁신을 반드시 이루어내겠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진 사건이다. 사고 원인뿐 아니라 사고가 참사로 이어진 과정까지 철저히 규명하는 작업이 우선돼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세월호 참사가 넉 달 만에 여당 내에서 ‘교통사고’로 격하되는 듯하더니 급기야 이번 경축사에서처럼 대통령의 언어에서 지워지기에 이른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정치권이 국가혁신과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는 식의 ‘정치권 책임론’도 문제다. 박 대통령은 “지금 경제법안들이 발이 묶여서 어렵게 일궈낸 경제활성화의 불씨가 언제 꺼져버릴지 모르는 위기감에 싸여 있다”며 “정치권이 진정 국민을 위하고, 민의를 따르는 정치로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길에 앞장서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야당을 무시하고 국회를 겁박하는 듯한 이런 태도로는 경제활성화와 국가혁신은 고사하고 정국 안정조차 기대하기 어렵다.

대북 메시지 부분도 기대에 못 미친다. 대화와 협력을 강조하고 하천·산림 관리 공동 협력사업, 북한 대표단의 10월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 참석, 이산가족 상봉, 민생 인프라 협력, 남북한 광복 70주년 공동기념 문화사업 등 구체적인 제안을 한 것이 그나마 지난해보다 진일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정책이나 태도 변화도, 북한을 설득할 수단이나 전략도 읽히지 않는다. 신뢰 회복과 단절된 상태를 복구하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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