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정당함’을 표현하는 언어다. 세계와 인간과 삶의 본질인 ‘좋음’을 구현하기 위한, 즉 실존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란(rebellion)’이나 ‘반역(revolt)’과 구분해 ‘혁명(revolution)’이란 말을 별도로 만들어 쓰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혁명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으로 기존의 권력층을 뒤엎거나, 특정 정권을 타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와 인간과 삶의 본질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낡은 체제(앙시앵 레짐)를 새로운 체제로 대체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근대 문명의 정치적 특성인 민주공화제의 등장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혁명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프랑스 대혁명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보면 혁명이 반란이나 반역과 다른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루이 16세가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반란인가?”라고 물었으나, 그의 최측근이었던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가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는, 혹은 이 일화를 소개한 <프랑스 혁명>(1837)의 저자 토머스 칼라일은 루이 16세와 달리 바스티유 감옥 함락의 의미가 루이 16세의 퇴진만이 아니라, 시민과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절대왕정과 신분사회로 압축되는 앙시앵 레짐의 사멸과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질서, 즉 민주공화제를 요구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미국의 독립혁명도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에 앞서 일어난 미국 독립혁명 역시 단지 영국의 왕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획득’이라는 좋음을 추구한 사건이다. 프랑스와 미국 외에도 근대 문명 세계에서 강대국 혹은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 대부분이 혁명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다. 근대 의회정치 발전의 기초가 된 명예혁명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다. 독일도 기억할 만한 혁명의 역사를 갖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말미인 1918년에 제정을 무너뜨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기초를 세운 11월 혁명이 그것이다. 아예 유럽 전체를 휩쓸면서 혁명의 경험을 선사했던 사건도 있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수용토록 한 1848년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새해가 밝았지만, 세상은 아직 어둡습니다. 지난해 세밑까지 촛불을 들었을 때 시민들은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라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촛불은 ‘여기 사람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였습니다. 암흑에 빠져 있던 민초들을 꺼내야 한다는 구조 신호였습니다.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이었습니다. 새해에는 촛불을 켜지 않아도 대지와 광장의 목소리들이 곳곳에 전달됐으면 합니다. 시민들의 삶이 밝아졌으면 합니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16년을 보내고 2017년을 맞은 새해 첫날 새벽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김창길 기자

최근 대한민국에선 촛불시위 과정에서 혁명이란 말이 공론장에 다시 등장했다. 시위 참가자들이 혁명이란 슬로건을 들고나오고, 지식인들이 촛불시위의 성격을 시민혁명으로 파악하면서다.

4차 산업혁명론을 필두로 문명의 전환이 거론되고 있고,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계기로 ‘대한민국 재설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에서, 혁명이 공론장의 주요 토픽으로 등장한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이번 기회에 촛불시위를 통해 모아진 민의를 구체제의 청산과 새로운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가야 한다.

하지만 작금의 촛불시위가 실제 혁명으로 이어질지 아닐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분명 혁명의 기운만이 아니라, 혁명으로 평가할 면모까지 갖추고 있다. 다수의 참여와 결집을 가능케 한 평화적 방식의 고수가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내가 대표한다”는 기치하에 기성 질서에 대해 해학과 풍자의 언어를 구사하고, 기존 운동단체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의사표현과 참여의 방식도 그러하다. 혁명으로 불린 여타의 역사적 사건들에 비했을 때조차 혁명적이다.

촛불시위를 이런 방향으로 이끈 촛불시민은 ‘새 술’이다. 촛불집회의 진행을 담당했던 한 인권운동가가 “이들이 다 어디서 (광장과 거리로) 나왔나”하고 물음을 던질 정도로 새롭게 등장한 주체이다.

고약한 승자독식체제에서의 고단한 일상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벗과 함께 광장을 사수한 주체들이다. 그러나 아직 촛불시민이라는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없다. 새 술의 맛을 더 감칠나게 할 새로운 장인이 누군지도 아직 모르겠다. 촛불시위를 여전히 일시적 저항의 관점에서만 조망하거나,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로만 몰아 개헌만 힘주어 주창하거나, 정치권의 이합집산을 통해 자파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는 기성 정치인들, 특히 노회한 정객들을 볼 때 그러하다.

2017년, 이들을 넘어서서 촛불시민 스스로가 새 부대를 마련하고, 새 술의 맛을 더 감칠나게 할 새로운 장인을 발견해내길 갈망한다. 그래서 촛불시민이 혁명의 도정에서 진짜 주역으로 서길 기대한다. 그런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면서 혁명의 의미를 다시금 짚어 본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수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할 때다. “그들이 온다!”고 하면 비상이 걸렸다. 인권위 건물을 점거무대로 삼은 장애인들이었다. 칼날 같은 주장과 거친 몸싸움에 엘리베이터를 점거하고 밤샘농성도 불사했다.

왜 저럴까?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더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과격하면 거부감만 더 커진다는 것을 왜 모를까? 그런 선입견이 작동하면 그들의 울부짖음의 내용은 잘 들리지 않게 된다.

나중에 하나하나 살펴보니 구구절절 옳지 않은 주장이 없었다. “장애인도 공부하고 싶다.” “제발 지하철 타고 다닐 수 있도록 하라.” “규율이 지배하는 시설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 “우리도 사람이다. 1급, 2급으로 등급 매기지 마라.”

주장은 과격하지 않았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것에 불과했다. 장애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눈감고 귀 막은 비장애인에게 있었다. 존중받지 못하니 목청이 높아지고 차츰 분노가 쌓이며 쇳소리가 날 수밖에.

들어주고 만나주지 않으니 행동은 더 과격해질 수밖에 없다. 혹 아는가? 장애인들이 쇠사슬로 몸을 묶고 버스 바퀴 밑으로 몸을 던진 뒤에야 휠체어로 오르내릴 수 있는 저상버스가 이 땅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장도리]2017년 1월 2일 (출처: 경향신문DB)

광장의 일렁이는 촛불과 함께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희망을 염원하던 사람들은 이제 촛불을 들고 탄핵 이후의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촛불혁명의 목표는 정권교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광장의 목소리는 다양하다. 혹자는 재벌개혁을, 누군가는 특권과 부패 척결을, 어떤 이는 갑질과 학벌주의와 남성중심사회의 청산을 주장한다. 나는 평등과 정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구체제와 낡은 질서 대신에 들어서야 할 사회의 중심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중에 인권위를 찾아오던 장애인들이 자꾸 떠올랐다. 탄핵과 정권교체를 외치던 광장의 사람들은 탈시설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갈 지역사회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에도 한목소리를 낼까? 터무니없는 임금과 비인격적 대우를 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거나 처우 수준을 높이자고 하면 받아들일까? 인종차별을 견디며 온갖 허드렛일을 감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이민을 허용하자고 하면 어떨까? 성소수자를 차별·혐오하는 대신 존중하고 연대할 수 있을까? 그 밖에도 많다. 미혼모와 노숙인과 독거노인과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신용불량자와 난민에게도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면 과연 얼마나 수용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중대한 국면에 부딪힐 때면 흔히 간과되는 것이 소수자와 약자의 문제다. 소수자의 문제는 ‘사소한’ 문제나 ‘골치 아픈’ 문제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지금은 단결이 우선이고 분열되어서는 안되니 우선 좀 참으라고 한다.

상황은 선거 국면에 접어들면 훨씬 더 나빠진다.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 뛰는 자들에게 소수자의 목소리는 간과되고 묵살된다. 그래서 소수자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된다.

한국의 인권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론 염려스럽다. 자신의 인권에 대해서는 민감성이 드높아졌지만 이웃의 인권 침해나 차별에는 무심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가 아니니 소수자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권침해의 경사에 놓인 바위는 멈추지 않고 굴러떨어진다. 소수자를 위협하던 인권침해는 곧 나의 인권을 위협한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소수자이고 약자이다.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비유 중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이야기가 있다. 목자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얼핏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흔아홉 마리의 양 입장에서 한번 보자. 언젠가 길 잃은 양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신뢰하게 되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자를 믿고 따르지 않을까?

소수자와 약자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곁가지로 사소하게 취급되어서는 안되며 우선적으로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인권의 가치인 자유와 평등은 따뜻한 연대를 통해 비로소 충만해진다.

촛불광장은 다양한 소수자의 목소리로 채워져야 한다. 작은 목소리를 내도록 격려하고, 광장에 나오지 않는 소리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촛불이 되고, 서로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이리라.

문경란 |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국내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아르바이트·단시간 일자리 등은 청년층으로 채워진 지 오래다. 낮은 임금, 낮은 고용의 질, 낮은 삶의 질 등은 청년층을 지칭하는 사회적 용어가 돼 버렸다. 소득양극화와 취업난, 주거난에 시달리는 청년층은 ‘N포 세대’를 넘어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21일 내놓은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는 청년세대가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지난해 30세 미만 저소득 청년 가구(하위 20%)의 한 달 소득은 80만7000원으로 집계됐다. 취업난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탓이다. 한때 저소득 청년층을 일컫던 ‘88만원 세대’가 ‘77만원 세대’로 대체될 시점이 머지않은 것이다.

청년 가구의 소득불평등도 심화돼 최상위 20%와 최하위 20%의 연평균 소득 격차는 9.56배에 달했다. 가계빚도 2년 새 900만원 넘게 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20대 청년층 2명 중 1명꼴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겼다고 체념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 가구의 경제난은 출산율 하락과 맞물리면서 성장 잠재력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정부는 실효성 있는 청년고용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뒷짐만 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고용률 70% 정책은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는 것으로 변질됐다. 청년고용할당제는 공공기관에서 민간기업으로 확대되지 않아 ‘반쪽 대책’에 그쳤다. 내년 최저임금을 고작 7.3% 오른 시급 6470원으로 결정한 정부는 미취업 청년들에게 최장 6개월간 일정액을 지급하는 서울시와 성남시의 청년수당·배당 사업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무능한 정부가 보인 옹졸함의 극치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기본급·상여금·수당 차별을 없애는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일본 정부는 비정규직 임금을 정규직의 80% 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비정규직의 저임금 문제를 해결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일본 정부의 노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청년세대가 꿈을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나라의 미래는 기대할 게 없다. 청년세대가 광장에서 촛불을 든 것은 불평등한 사회를 바꿔보려는 간절함 때문이란 것을 정부와 정치권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연말이 되면 으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낸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고 싶어진다. 내년에도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질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한다. ‘당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나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해봐야 하는 것들’과 같은 리스트가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길을 지나다 초등학생 둘을 만났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책가방이 유독 무거워 보이는 아이가 입을 열었다.

“시험 망쳤어.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 들어.”

옆에 있는 아이가 맞장구쳤다.

“나도 자괴감 들어! 밤새워서 공부했는데, 공부한 데서 하나도 안 나왔어.”

이렇게 자괴감에 사로잡힌 아이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자괴감을 느껴야 할 대상은 정작 아무렇지 않은데 자괴감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아이들의 입에서 앞다투어 자괴감이라는 단어가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5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 사과를 하기 전 원고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자괴감은 올해 하반기에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일 것이다. “이러려고 대통령 하려고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라는 담화문 속 대통령의 말은 국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이러려고 주식투자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이러려고 직장인 했나 피로감 들고 괴로워”처럼 자기 자신과 관련된 토로부터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이러려고 세금 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처럼 정부를 향한 따끔한 일침까지 곳곳에서 패러디가 이루어졌다. 패러디의 끝에는 해학이 남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뒤끝은 늘 씁쓸했다.

자괴감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대통령은 이 단어를 원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하긴 담화는 본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을 상정하는 것인데, 대통령은 일체의 질의응답을 허용하지 않은 채 자기 말만 하고 들어가 버리지 않았는가. 나는 대통령이 담화문을 읽을 때 자괴감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움’이 아닌 ‘분노’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은 분명 화가 나 있었다. 자기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여기저기서 칼끝을 겨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때문에 정작 자괴감을 느낀 것은 국민들이었다.

인간이 자괴감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은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 없이 어찌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겠는가, 자괴감을 건너지 않고 어떻게 자부심에 가닿을 수 있겠는가. 부끄러움은 다음을 기약하게 해주는 마음이다. 부끄러움이 있어야 반성을 할 수 있다. 조금 더 떳떳하고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괴감은 ‘앞으로’를 내다보는 마음이다. 대통령의 자괴감은 앞이 아닌 뒤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억울하고 화가 난 것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 아니면 양심에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이다. 나는 대통령의 자괴감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국민들의 자괴감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혼란스러운 정국 때문에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주말을 반납하고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자책감을 느끼고 배신감을 참을 수 없어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도 보인다. 무너지고 난 후에야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힘든 상황일수록 그것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절절히 깨닫게 된다. 자괴감이 심화되면 심한 자책이나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는 상태 말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다시 모였다. 역설적으로, 이 또한 우리가 자괴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도록, 우리는 촛불을 더 높이 들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던 날, 우리는 입을 모아 외쳤다. 촛불이 이겼다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침묵은 진실을 덮을 수 없다고. 이기는 경험을 했다는 것, 다음을 기약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경험이다. 희망이 아직 남아 있음을 온몸으로 깨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내가 바로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괴감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다. 자괴감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성찰의 시간이다. 우리는 광장에서 작년과는 다른 우리의 존재감을 이미 재확인했다. 국민들은 자괴감을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괴감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대통령과 얼마나 다른 품격인가.

오은 | 시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중국에 불파불입(不破不立)이라는 말이 있다. 파괴가 없으면 새로운 건설도 없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촛불혁명은 구체제에 균열을 내는 데 성공했다. 불립불파(不立不破)라는 말도 있다. 건설이 없으면 파괴도 없다는 뜻이다. 구체제에 균열을 내어도 새 체제 건설에 실패하면 죽 쒀서 개 주는 격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탄핵 결정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음의 질문을 서둘러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수 있는가? 여러 측면에서 말기적 증상을 보이는 소위 ‘87년 체제’를 새로운 체제로 전환시키는 길은 무엇인가? 87년 체제는 1987년 헌법을 제도적 기초로 하기 때문에 개헌이 이를 위한 주요 수단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개헌안이 체제전환은 차치하고라도 정치제도라는 면에서 어떤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체제전환의 핵심적 내용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수단과 관련한 논의만이 분분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제기되는 개헌론에 정치적 사심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단과 경로에 대한 논의에 앞서서, 체제전환의 목표와 과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개헌이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개헌의 핵심내용은 무엇인지를 논의할 수 있다. 지금의 87년 체제를 더 인간적이고 활력이 있는 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과제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 번째, 수구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동안 절차적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서구 정당정치의 모델을 한국정치에 적용시키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분단체제로 인해 우리의 정치현실은 서구와 다르다. 수구세력은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절차도 무시했고, 민주주의는 큰 위기에 빠졌다. 그 위기는 ‘광장의 정치’를 통해 극복되고 있다. 우리가 참여하고 목격하고 있는 광장의 정치는 정치의 낙후성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광장의 정치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그렇지만 수구세력의 통치기반에 대한 제도적·인적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또 다른 정치적 퇴행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두 번째, 불평등·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담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 실행에 나서야 한다. 경제영역에서는 최저임금 인상과 복지확충은 물론이고, 재벌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시스템 건설을 공론화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재벌이 주도하는 한국경제의 성장모델이 붕괴 과정에 접어들고 있다는 조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중앙집권은 우리나라의 활력을 억누르는 주요 원인이다.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을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중앙으로의 과도한 권력집중이다. 비대한 중앙권력의 문제가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 문제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연방제 수준으로 분권화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제도개선 없이는 어떤 권력구조를 택하더라도 권력의 과도한 집중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정치적 불균등·불균형 해소도 중요하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이 시급하다. 국회의원 선출에서 비례성을 강화하고 주요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것을 통해 제도권 정치가 다양하고 폭넓은 민의를 대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87년 헌법 논의가 정치적 독재를 청산하기 위한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앞으로의 개헌논의는 불평등·불균형 해소를 핵심 의제로 삼아야 한다.

세 번째,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 및 국제 협력을 진전시켜야 한다. 현재처럼 남북이, 북·미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쉬운 과제는 아니다. 이 의제는 수구세력에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민주개혁세력에 불리하다고 생각할 일만은 아니다. 대북정책에 대한 수구적 노선과 태도가 안보를 오히려 위협하는 상황을 낳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우려가 국민 여론 속에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기들을 잘 활용하면 안보담론을 평화, 안전, 생명 담론으로 재구성해 갈 수 있다. 이 작업의 진전에 따라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이다.

새 체제로의 전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위해 재벌에 의존하거나 분단에 대해 체념하는 태도 등과 같은 구체제 중독에서 벗어날 각오를 다져야 한다. 우리는 정말 중요한 전환기에 서 있다.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어느 낮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한 낱말을 되뇌었다. 모르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 들은 말인 양 계속 중얼거렸다. 머금다, 머금고, 머금으며…. 그러다 그만 턱이 진 길에서 발을 헛디뎠다. 등에 배낭을 멘 채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두 무릎이 얼얼했다.

2014년 4월16일에 딸을 잃은 엄마로부터 “우리는 머금고 사는데…”라는 말을 듣고 헤어진 뒤였다. 그 말이 그렇게 힘들고 아픈 말일 줄 몰랐다.

그이는 ‘빈자리’도 말했다. 딸과 아들, 부부, 해서 늘 네 자리였다. 집에서 마주앉는 식탁에서도, 외식을 할 때도 네 자리. 그러나 그날 이후 다시는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생겼다. 빈자리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자리, 딸 자리, 누나 자리, 친구 자리…. 모든 자리가 사라졌다. 딸아이와 의견이 달라 부딪쳐도 먹는 입맛이 비슷해 금방 풀고, 함께 옷을 사러 가는 일도 즐거웠다는데 이젠 그럴 자리가 없다. 무엇보다 딸에게 “네 꿈을 활짝 펼쳐나가라”며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일이 행복했건만 딸 자리를, 엄마 자리를 빼앗겼다.

6차 촛불집회가 열린 3일 청와대에서 100m 떨어진 서울 종로구 효자치안센터 근처 경찰버스 차벽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희생된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진 보자기를 두른 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엄마는 ‘사소한 행복을 꿈꿨던 아이들’이라 말했다. 딸이 단짝과 함께 종이 가득 빽빽하게 적은 버킷리스트를 사람들에게 꼭 알리고 싶다고 했다. 사소한 행복을 꿈꾸던 아이들을 으스러뜨린 한국사회와 이 정부 모두에게.

한 아빠는 ‘가장 슬픈 사진’을 말했다. 스마트폰 대기화면에서 딸은 구명조끼를 입고 기다렸다. 차분했다. 당연히 구조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 학생들의 모습만 보아도 그때 거기, 구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빠에게는 딸의 사진 가운데 가장 기쁜 사진과 가장 슬픈 사진이 있다 했는데 가장 슬픈 사진을 스마트폰 첫 화면에 담은 건, 어쩌다 잠시라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일까.

어떤 엄마는 자신에게 ‘전부였던 아이’를 말했다. 전부인 아이가 가고 나니 세상을 온통 다 잃은 듯하다 했다. 세상에 대고 아이를 자랑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이 흉볼까 나중에 더 크면 해야지, 미뤄두고 참았건만 그 자랑, 전부를 쏙 앗겼다.

다른 엄마는 ‘생일’을 말했다. 돌아온 딸의 생일, 너무 힘들었다 말하는데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실컷 울면 좀 나을까 싶지만, 어린 막내가 볼까 맘껏 울 수도 없었다. 한 해 365일 하루하루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304명이 세상에 왔던 하루하루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전율’이라 말했다. 딸을 잃은 딸은 부모 앞에서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가 잠든 추모공원을 찾아가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을 하면서 울었다.” 그러고도 눈물이 차고 넘치는 날이면 딸은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다 눈이 퉁퉁 부은 채 출근했다.

할머니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의 그리움을 말했다. “17년을 살면서 식구들과 떨어져 지낸 게 길어야 하루 이틀이고, 그럴 때도 집에 오고 싶다고 그랬던 아이인데, 이렇게 오래 가족 곁을 떠나 얼마나 식구들이 보고 싶겠어요, 집에 오고 싶겠어요.” 언제든 왔다 가라고, 잠시라도 쉬었다 가라고 손녀의 방문을 늘 열어둔다. 책상도, 책상 위 컴퓨터도, 책꽂이의 책도, 좋아하던 기타도, 액자 속 사진도, 서랍장 안 즐겨 입던 초록빛 스웨터도 다 그대로다. 주인 없는 빈방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부르며 달려 들어올 듯한 방이다.

어느 엄마는 ‘이름’을 말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불러보고 싶다 했다. 2015년 3월30일 월요일 오후 7시39분,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맞은편 푸르메재단 앞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간 엄마, 아빠들이 몇 번이고 외쳤다. “내 새끼 보고 싶다!” 마지막 외침 뒤에는 다들 목메어 울었다.

지난주 토요일, 이제까지 가로막혔던 청와대 가는 길을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04명을 구하지 않은 책임만으로도, 진실을 규명하라는 이들을 외면한 것만으로도 대통령은 옳지 않다. 6차 촛불집회, 여기저기 광장이 된 곳에서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박수정 | 르포작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금 한반도 남쪽에서는 일찍이 세계정치사에서 본 일이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시민혁명이 벌어지고 있다. 벌써 한 달이 넘게 매 주말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새로운 정치질서를 외치고 있다. 입으로는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지만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만약에 이 거대한 시위가 통치능력이 없는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한국인은 그저 데모나 잘하는 국민으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은 야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주었지만 이들이 집권한다고 해서 새로운 정치질서가 들어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며칠 전에도 대통령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법리에도 맞지 않은 제안을 던지자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의원들을 보고 촛불민심은 믿을 게 자신뿐이란 것을 더욱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말이 국민의 대변자이지 사실은 기존의 정치구도 안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그야말로 악마와도 손을 잡는 무리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의원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척박한 환경 속에서 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시나브로 사라지고 만다.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집권당과 그 수족인 권력기관들은 야당을 마음대로 주물러가며 반세기 넘게 부패한 권력구조를 유지해 왔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정치란 현실이고 타협”이라고 대답한다. 맞다. 문제는 너무 쉽게 원칙을 저버리고 타협한다는 것이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이 그랬고, 김대중이 김종필의 손을 잡은 것이 그랬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삼김시대’가 끝났다고 말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11월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야당은 물론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중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다 삼김의 정치적 적자이거나 그 문하생들이다. 물론 박정희를 비롯해 삼김은 모두 위대한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다. 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약진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피와 땀의 결정체이지만 그들의 리더십에 힘입은 바도 크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지나친 권모술수와 밀실야합, 지역할거 구도는 한국정치를 막다른 길로 몰아세우고 말았다. 모든 정보가 빛의 속도로 오고 가는 시대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정치유산을 끌어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민혁명이 일어난 배경이고 또 청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지금의 시민혁명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제1야당의 문재인 전 대표이다. 공정한 선거관리가 이루어졌다면 어쩌면 그가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제 광주에서 “촛불을 계속 들어 시민혁명을 완성하자”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촛불집회에 가서는 자유발언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미리 예언하지만, 이 작은 사건의 의미를 제1야당 지도부가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시민혁명이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시민혁명은 시민들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혁명 정세는 대단히 특이하다. 지난 세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인민들이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국가의 공권력이 건드리면 무너질 정도로 허술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다 짱짱한데 오직 정치적 리더십만 부재한 상황이다. 이 난국을 만든 책임이 있는 청와대와 집권여당은 재집권보다는 살아남기에 더 급급할 것이고, 야당은 탄핵만 성사되면 자동적으로 집권할 수 있으려니 하겠지만 촛불민심은 여야를 떠나 새로운 정치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순간 가장 강력한 권력인 촛불세력이 제도권 밖의 존재이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한시적인 집합체인지라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누구는 바람만 불면 꺼질 것이라고 하고, 누구는 거대한 쓰나미이니 거기에 얹혀 권력을 한 번 잡아보자고 한다.

다 틀렸다.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나라의 정치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관점이다. 만약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 시민혁명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내어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먼저 촛불시민 세력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대의 또는 소통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이름이야 어떻게든 붙여지겠지만 일단은 그냥 ‘시민권력’이라고 하자. 의회는 여야 협상을 통해 시민권력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한시적인 법을 제정해야 한다. 행정부와 사법부는 시민권력과 의회가 지정한 비상거국내각이 통할한다. 물론 이 아젠다는 시민들이 계속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온다는 가정하에 성립할 것이다.

지금의 촛불집회는 하루아침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멀리는 4·19혁명에서 광주민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08년 광우병 파동을 거쳐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이다. 한때 한국의 시위에는 화염병과 최루가스가 난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비폭력 평화시위 기조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축제의 요소까지 곁들어져 외국인 관광객들도 안심하고 참여하는 문화상품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가히 한국의 시위문화는 세계 최고의 수준과 선진성을 자랑한다. 이러한 시위문화를 일궈낸 한국의 시민들이기에 비록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기어이 혁명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명언이 있지 않은가!

황대권 | 생명평화마을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국민들이 선거 날만 주인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18세기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현대정치, 현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이렇게 비판한 바 있다. 최근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을 바라보면서, 정치학자로서 가장 자주 떠오르는 것은 이 비판이다.

그렇다. 2012년 12월19일 우리는 주권자로서 한 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 이후 지난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다른 후보를 찍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까지, 박근혜의, 아니 최순실의 ‘노예’에 불과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국회는 어떠한가? 보수야당들조차도 분노의 촛불이 광화문에 넘쳐나기 전까지는 기껏해야 ‘질서 있는 퇴진’ ‘명예로운 퇴진’을 주장하며 몸조심하기에 바빴다. 박근혜의 지지율이 4%로 떨어지고 국민의 80%가 탄핵을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친박계는 아직도 탄핵에 반대하고 있다. 이정현·김진태 의원을 뽑은 순천과 춘천 시민들이 박근혜의 사수대 역할이나 하라고 이들을 국회에 보낸 것인가? 비박계 역시 오락가락하다가 지난 주말 촛불에 놀라 뒤늦게 탄핵 합류를 선언했지만, 언제 다시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 한국 대의 민주주의는 중병에 걸려있다. 만일 탄핵안이 국회에서 부결된다면 사망선고를 받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개최한 촛불문화제에서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를 어쩔 수 없는 ‘현대정치의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문학의 ‘재현(representation)’ 논쟁이 불붙고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간헐적으로 진행됐다. 재현이란 어떤 사물을 다시 형상화하는 것인데 재현이 대상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듯이, ‘대의’ 역시 불가피하게 민의의 왜곡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 같은 부분적 재평가를 넘어서 대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번 촛불항쟁의 밑바닥에는 단순한 권력남용을 넘어 헬조선, 흙수저, 신분세습제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논의를 정치 문제로 국한시킨다 하더라도,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낸다고,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있는 ‘87년 헌정체제’(제왕적 대통령제)를 타파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설사 내각제로 정부 형태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탄핵 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대통령의 독재’를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국회의 독재’로 바꾸어놓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이번 문제의 핵심에는 루소가 고발한 대의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자리 잡고 있다.

촛불을, 광장을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낼, 아니 이미 몰아낸 힘이 거기서 나왔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계기와 가능성을 촛불과 광장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이후에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공화국’의 단초들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광장은 전국 1500개 시민사회단체가 밑으로부터 퇴진운동조직을 만들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광장을 메우고 있는 것은 일반시민이다. 구체적으로 1500개 조직의 조직화된 참여자는 20만명 수준이며, 90%는 일반시민이다. 직접민주주의가 폭발한 것이다. ‘운동 내에서의 직접민주주의적 계기’들도 주목해야 한다. 주요 단체의 대표들이 단상에 포진하고 의례적으로 발언을 과점하는 ‘운동 내의 대의제’가 약화되고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발언권을 갖는 직접민주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일부 운동권의 돌출적 행동에 대해서도 대중들이 비판하고 규율하고 있다. 탄핵 결과와 상관없이 이제 민선공직자 소환제 강화 등 대의제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술하고 직접민주주의적 기제들을 극대화해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본회의 상정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대부분 의원들은 입장을 천명했지만, 유독 새누리당 초·재선 80여명의 표심만 안갯속이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권력 재편은 물론 이후 국회 재구성까지 이들 손에 달린 형국이다. 여당 초·재선 의원들이 방관하지 말고 책임있게 행동하고 시민의 물음에 답해야 하는 이유다. 탄핵소추안은 야 3당과 무소속 의원 등 171명 명의로 발의됐다. 나머지 새누리당 의원 128명 가운데 비주류 30여명은 탄핵에 찬성하고 있다. 지도부와 친박계 30여명은 반대를 천명하고 있다. 나머지 60여명은 침묵하거나, “고민 중”이라며 답변을 유보하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익명의 그늘 뒤에 숨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제만 해도 232만명이 전국 67곳에서 촛불을 들고나와 박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여당 초·재선들이 탄핵안 처리 요구에 답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대통령의 범죄는 친박이니, 비박이니 하는 계파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탄핵소추안에 적시된 대통령 범죄에 동조 혹은 묵인하느냐, 반대하고 처벌토록 하느냐는 선택의 문제다.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으로서 판단을 내리고 답해야 한다. 다선 의원들은 파당의 핵심이 돼 있고, 공복으로서 의무보다 정치적 이득에 몰두해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한다. 탐욕과 노여움, 어리석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초·재선들이 나서야 엉킨 매듭을 풀 수 있다. 부끄럽지 않은 보수정당으로의 변모도 때가 덜 낀 초·재선이 주도할 때 가능하다.

무엇보다 의원이 복종할 대상은 공천장을 준 옛 당 대표도 아니고, 좌충우돌하는 현 당 대표도 아니며, 청와대에서 뭘 하는지 모르는 대통령 박근혜 개인도 아니다. 좁게는 자신을 찍어준 유권자, 넓게는 시민 전체를 위해 복무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시민들이 지금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9일 국회에서 탄핵안 처리가 무산됐을 때 후폭풍이 어디로 불지 자명하다. 촛불은 국회, 당사, 지역구 사무실로 옮아갈 것이다. 이미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고 말한 김진태 의원 지역구에서 촛불·트랙터 시위가 열렸다. 가만히 있어도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광장에서 촛불을 켠 고등학생들은 21대 총선에서 생애 첫 투표를 한다. 이들은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당신은 3년 반 전 탄핵소추 때 무엇을 했습니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그리고 겨울이 되었다. 토요일의 삶을 잃어버린 지 한 달 하고도 열흘, 그사이, 가을 산야는 속절없이 불타올랐고, 광장에는 진눈깨비 첫눈이 내렸다. 광장을 다시 찾았고, 어둠이 내린 거리를 낯모르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촛불을 들고 걸었으며,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어제 정오 수업에서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들과 김탁환의 최근 소설에 대한 학생들의 발표가 있었다.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장르적으로 ‘소설’로 분류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과 원전 사고를 겪은 구소련권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지역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200명의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 김관홍 민간 잠수사의 탄원서 내용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에 접근해간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소설은 픽션, 곧 지어낸 허구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 지어낸다 해도, 현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당해낼 수 없는 경우, 곧 현실이 픽션을 압도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재난 참사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이것은 소설인가’, 소설 속 인물들을 만나면서 ‘이것이 인간인가’ 끊임없이 자문한다. 수많은 밤 이러한 질문들과 맞서며 혼신의 힘으로 써온 것이기에, 학생들의 발표는 뜨겁고, 감동적이다. 그들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온 사건이 어느 순간 자신의 삶 한가운데로 육박해 들어오는 경험을 하고, 눈앞에 벌어진 사실 뒤에 은폐된 진실을 직시하고,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주시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절규하는 목소리들을 온몸으로 겪고 온 날 밤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가 추스르듯 촛불 하나 켜놓고 플로베르의 소설을 펼친다. 펠리시테라는 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단순한 마음>이다. 단순한 마음이란, 삶에 바치는 소박한 마음, 인간을 대하는 순박한 마음이다. 소설사에서 대가로 추앙받는 플로베르가 말년에 발표한 소설인데, 주인공은 펠리시테라는 프랑스 북부 작은 포구 마을에 사는 가정부이다. 플로베르는 이 여성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녀는 착한 마음씨와 옳은 일에 헌신하는 뜨거운 정신의 소유자일 뿐, 털끝만큼도 사심(私心)을 거느리지 않은 견결한 여성이다. 그녀의 일생을 둘러싸고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음에도 읽어갈수록 인간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경험해서인지 깊은 여운이 남는다.

다시 토요일은 돌아오고, 올곧은 마음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나 가능한 걸까.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물러서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일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함정임의 세상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에 관한 긴 이야기  (0) 2016.12.28
현현(顯現),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  (0) 2016.12.14
단순한 마음  (0) 2016.11.30
코뿔소  (0) 2016.10.19
베르노와 바로스, 그리고 금희  (0) 2016.10.05
잊혀진, 잊히지 않는  (0) 2016.09.2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평소에는 올려다보기도 힘들 만큼 고압적인 광화문이 그토록 처연한 모습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귀를 때리는 스피커의 울림이 멀리 보이는 화면과 전혀 맞지 않는, 각자의 외침과 노랫소리가 100만, 혹은 200만의 인파와 함께 뒤엉기는 혼돈 속에서 문득 치밀어 올라온 것은 깊은 서러움이었다. 내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광장을 메운 낯선 이들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도 이런 서러움이며, 그들도 지금 목이 메고 있을까. 문득 스피커에서는 ‘길가에 버려지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광장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이끄는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는 점이다. 분노는 강력하나 일시적이고 이토록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다. 이토록 철저하게 질서있고, 차갑도록 뒷정리에 신경을 쓰며, 가족과 함께 유모차를 밀고 오게 하는 힘은 분노는 결코 아닐 것이다. 바람이 불면 꺼지는 분노보다도 훨씬 더 서늘하게 깊고 무거운 그 무엇일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버려진’ 서러움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유전자에 각인될 정도로 소소한 일상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국가, 좌측통행을 어느날 우측통행으로 바꿀 수 있으며 조의금을 얼마나 주고받을 수 있는지까지 결정해주는 국가, ‘한강의 기적’을 이끄는 엔진이었으며 사회경제 모든 분야를 베 짜듯이 효율적으로 지휘하는 국가. 그 국가가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한낱 홑이불 뭉치에 불과했다는 자각이야말로 이 상실감과 서러움의 원인이 아닐까. 경외하면서도 미워하고, 그 무능함에 치를 떨면서도 그 존재를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던 국가가 사실은 한번도 ‘거기 없었다’는 사실이 이 열패감의 원인이 아닐까.

26일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서울 도심인 광화문과 세종로 일대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이석우 기자

이런 ‘버려진 서러움’은 새로운 것도 아니다. 다만 세월호 참사나 백남기 농민을 잃는 과정에서 우리는 국가가 실패하였다고 생각했다. 메르스 창궐이나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국가가 시민들의 생명권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나 개성공단 폐쇄에서, 그리고 각종 사안들에서 국가가 시민들의 말을 듣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패’한 것이 아니라 공적 과정으로 국가가 ‘부재’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던지는 물음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며 포괄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정치적이라 함은 법적 책임을 묻는 지점을 넘어선다는 의미이고, 포괄적이라 함은 청와대를 넘어서서 국가와 사회 전반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는 의미이다.

청와대의 법적 책임은 물론 ‘입증의 책무’(onus probandi)를 진 검찰과 특검이 범법을 확증할 수 있는 지점까지만 한정될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법정에서 가려질 법적 책임과는 달리 청와대와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은 스스로의 결백과 여러 의사 결정과정의 절차적 정당성을 국민과 동맹국가들에 납득시켜야 하는 또 다른 무겁고 지난한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검찰 조사나 특검이 책임질 법적 절차 못지않게 중요하고 의미있게 지켜보고 평가해야 할 것은 국민이 위임한 권한의 다른 축인 국회가 밟게 될 국정조사 과정이다. 나는 대통령의 사임이나 탄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명백하고 정직하게 밝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2, 제3의 ‘박근혜 정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광장이 제기하는 문제들의 근본적인 포괄성은 청와대의 범위를 넘어서 정부와 정당, 나아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거버넌스 구조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국정농단’이라는 편리한 말로 뭉뚱그려지는 결과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특정 사익 집단이 어떤 경로로 공적 의사결정을 좌우할 수 있었고, 어떻게 공당(公黨)과 의회와 사회집단이라는 저지선을 돌파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재벌과의 상호침투가 가능했는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들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이 편리하게도 준비하고 있는 ‘개헌’이라는 답변은 지나치게 제한적이고 손쉬운 해답일 따름이다.

이러한 일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당장 손쉬운 대답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이 많이 했던 말이 이러한 나라를 아들딸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는 바람이었던 것처럼 광장은 과연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을 것이며, 끊임없이 찾으려 할 것이다. 마치 ‘길가에 버려지다’가 이렇게 노래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의지에 날개가 돋아서/ 정의의 비상구라도 찾을 수 있길.”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서울 광화문 일대, 본래 맘 편하게 걷는 곳이 아니다. 머물러 있기에 적합한 곳도 아니다. 곳곳에서 전경과 마주칠 수 있기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빨리 지나가고 싶은 거리이다. 청와대와 가까운 효자로, 그리고 자하문로를 걸어본 사람은 누구나 그 기분을 안다.

2016년 11월26일 다섯 번째 주말 촛불집회가 열린 그날에 모인 군중은 청와대와 가장 가까운 곳까지 행진했고 그들의 요구를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야하라”고. 그날 군중의 한 명이 되어 세종대로를, 사직로를 그리고 종로를 오후 3시부터 그다음 날 새벽 1시까지 걸었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아침이슬을 맞겠다는 즐거운 결기로 무장한 이 거대한 인간의 집합체를 관찰했고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채집했다.

도시의 차량을 통제한다고 도심의 거리가 광장이 되지 않는다. 광장은 도시공학의 산물이 아니다. 물리적인 공간에 생명체인 인간이 모일 때 광장은 만들어진다. 동원된 군중은 광장을 완성하지 못한다. 동원된 군중에게선 광장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인인 자발적 의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26일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서울 도심인 광화문과 세종로 일대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이석우 기자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다. 모든 인간은 천부인권과 자연권을 갖고 있는 존재로 태어났음을. 서울의 150만명, 전국적으로 190만명의 사람들은 교과서에 단지 글로 존재하던 천부인권을, 그리고 국가는 자연권을 지닌 개인들이 맺은 계약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만들어냈다. 자신이 자연권을 지닌 사회계약적 주체임을 자각한 개인들이 모였다. 그래서 평상시 통치의 영역이자 국가의 의지가 재현되는 곳에 다름 아니었던 광화문 일대가 시민들의 광장으로 돌변하는 사태가 기적처럼 일어났다. 그 기적의 다른 이름이 촛불집회이다.

모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텍스트는 물리적 힘으로 변화했다. 그들이 행진할수록 결집된 의지는 자연권에 의거한 주권자의 엄중한 명령으로 바뀌었다.

자유발언이 펼쳐지는 광장에서 고등학생, 주부, 회사원, 농민, 목사, 외국인, 대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현재의 부당함에 대해 발언할수록 그들은 국민으로 동원된 착한 주체에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의 대칭성을 정확하게 파악한 사회계약적 주체로 거듭났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연인원, 그리고 물리적으로 그곳에 있지 못했어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광장에 접속한 사람의 규모는 ‘국민’에서 벗어나 ‘시민’의 역능(力能)과 비례한다.

조직에 속한 사람이든 그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든 이곳에선 ‘시민’이라는 주체로 합일된다. 깃발을 따라 행진하든 혼자서 행진하든 차이가 없다. 여기서는 혼자서(solitary)와 연대(solidarity)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국민’이라는 오래된 강제와 사유습관에서 벗어나는 한,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이미 수없이 손가락으로 연습했던 ‘좋아요’와 ‘공유하기’와 ‘댓글달기’는 시민의 구호와 몸짓으로 거리에서 재현된다.

‘국민’으로 소환된 사람은 의무를 우선시한다. ‘국민’은 자신의 미래를 국가가 제시해주길 기다린다. 그리고 국가가 제시한 미래를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은 채 믿어버린다. 국가에 의한 배신에 배신이 더해져도 미래를 국가에 기대는 관습을 ‘국민’으로 소환된 사람은 버리지 못한다. 사회계약적 주체로 거듭난 사람은 ‘국민’이 알지 못하던 시민의 ‘권리’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권리를 지닌 시민의 눈으로 지금 현재의 박근혜호 대한민국을 목격한 시민들은 “이게 나라냐”가 쓰인 손팻말을 들었다.

사회계약적 주체는 ‘광장’에서 각자의 미래를 상상하고 타인들과 교류한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를 원한다. 모든 ‘국민’이 ‘시민’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압축성장 신화에 사로잡힌 앙시앵 레짐의 모든 관습에서 유래한 관행과 제도들이 대체되지 않는 한, 박근혜가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어도 과거는 무한 반복된다. 박근혜라는 이름은 이곳에선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신화화되었던 한국 현대사의 앙시앵 레짐, 즉 구체제를 지칭하는 기호이다. “박근혜를 즉각 구속하라”는 외침은 구체제에 대한 긴급 정지명령에 다름 아니다.

박근혜는 박정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구체제가 지연된 현재이다. 박근혜 퇴진은 단순히 정권의 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유예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원한다. 미래는 현재가 작동 중지될 때야 비로소 다가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구호와 함께 통치의 거리 광화문 일대를 걷는다. “정치검찰을 청산하라. 검찰을 개혁하라”, 그리고 “재벌들도 공범이다, 정경유착 재벌기업 처벌하라”고. 사회계약적 주체는 현재에 대한 작동 중지 명령을 시민의 의무로 파악한다. 국가에 광장에서 수집된 우리 모두의 공통의 미래를 요구하는 것이 시민의 권리라 이해한다. ‘국민’이었을 때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는 광장에서 이제 모든 것이 된다. 미래는 대통령이 아니라 시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

현재를 유지하려는 사람은 초조하기에 얼굴을 찌푸리지만,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에게서 분노와 좌절은 찾기 힘들다. 여기엔 잉여의 무기력도 헬조선의 아나키스트적 분노도 없다. 여전히 진지하지만 영리한 군중들은 욕설의 카타르시스가 아닌 미래를 꿈꾸는 생성의 기쁨을 믿는다. 촛불집회는 이렇게 반복을 통해 진화했고 성장했다. 생성의 기쁨을 알아버린 사람은 폭력에 의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폭력은 현재를 지키려는 자의 비통한 마지막 몸부림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명령하는 국가와 통치하는 국가를 넘어서 광장을 담는 국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광장을 담지 못하는 그 어떤 정치, 그리고 그 정치가 제도화된 국가는 존재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2016년 11월26일 그날 “우리가 주권자다”, “우리의 명령이다”, “세상을 바꾸자”라는 외침은 그래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노명우 | 사회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가 기어코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국민들은 어떤 식으로든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체제의 매듭을 짓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문재인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박근혜만은 절대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유권자들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제도이고 규칙이므로. 박정희를 존경했기 때문에 박근혜를 좋아했던 유권자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보은(報恩)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덕분에 북한의 위협을 이겨냈고 이만큼 먹고살게 됐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딸을 꽃가마에 태우는 것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의 수미상관한 매듭이었다. 나는 다른 종류의 매듭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박정희 시대에는 작동했지만 점차 효용을 잃어 이제는 거의 작동하지 않게 된 시스템을 마침내 그의 딸이 철저히 절단을 냄으로써 매듭짓게 될 것이라는 예감. 결국 우리는 그 파국적 종언을 목도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파국은 다행스러운 면도 없지는 않다. 더 이상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이 되어버린 박정희의 기나긴 그림자를 마침내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파국 앞에서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설계할지를 의논해야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새로운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지금의 파국이 박근혜라는 한 개인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주권자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 승자독식의 선거제도, 노동을 비롯한 사회적 파트너의 철저한 배제, 5년 단임 떴다방 정권의 대통령 무책임제, 위험의 사회화와 이윤의 사유화 같은 제도의 조합은 지나간 모든 정권에서 문제를 야기해왔다. 그 꼭짓점에 어떤 개인이 앉느냐에 따라 문제의 정도와 양상이 달랐을 뿐이다. 우리의 제도는 언제나 문제를 안고 있었고, 박근혜는 그 문제를 판타지 소설로 만드는 주술을 부렸을 따름이다. 언젠가 이 시스템의 꼭짓점에 박근혜보다 더한 진짜 악마가 들어앉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새로운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5차 촛불집회를 이틀 앞둔 2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벽면에 시민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이석우 기자

내가 불행하게 생각하는 것은 야권의 유력 주자들에게서 ‘지도자의 언어’를 듣기 어렵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야권은 대체로 광장의 촛불에 뒤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것이 민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광장은 엄청난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광장은 앙시앵 레짐을 해체할 수 있지만,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지는 않는다. 박근혜 이후의 새로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파탄 난 정권과 덩달아 멈춰버린 행정부를 대신해 이 모든 논의를 국회가 책임 있게 이끌어나가야 한다. 그중에서도 야당이 앞장서서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고 권력을 가져올 준비가 되어 있음을 국민들에게 보여야 하고, 그중에서도 대선주자들이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는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야권의 대선주자들이 앞장서서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대선주자의 기득권은 지지율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러나 지금의 지지율은 우리가 그렇게도 재설계하고 싶어 하는 낡은 시스템하에서 얻어진 것이다. 지지율 1위인 문재인 전 대표를 보자. 이 와중에도 그의 지지율은 기껏해야 2~3%포인트 올랐을 뿐이다. 대결적 정치구도에서 그의 편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박근혜 하야를 요구하면서도 그의 편에 합류하기를 꺼린다. 확장되지 않는 지지율에 연연하기보다는 다른 주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하는 편이 훨씬 나은 전략이다.

국가적 민폐가 되어버린 박근혜를 하루라도 빨리 끌어내리기 위해 광장의 촛불이라는 동력을 활용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동시에 야권의 대선주자들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박근혜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무엇으로 채워나갈지 하나하나 합의하고 우리 중에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것만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국민들은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안심할 것이다. 마침 새누리당의 남경필 지사는 탈당을 결행했고 김무성 전 대표는 대선 불출마와 탄핵을 선언했다. 누군가는 불타는 수레에서 먼저 빠져나오려는 정치쇼라고 비판하겠지만, 비록 정치쇼라 하더라도 묵직한 희생을 감내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그들에게서 언뜻 지도자의 모습을 본 국민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제 공은 야권 주자들에게로 넘어왔다. 혁명의 시대이지만 지도자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한 시대의 파국적 종언을 넘어 새 시대의 청사진을 보여야 한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사회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