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미세먼지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과 머리를 맞댄다. 이를 위해 오는 27일 광화문광장에는 3000여명이 참여하는 300여개의 원탁테이블이 마련된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행사 이후 최대 규모로 시민 소통의 장이 마련되는 셈이다. 시와 자치구 공무원, 시교육청, 보건환경연구원 등 관계자들과 전문가, 언론인, 기업인,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참여한다. 하지만 주부 등 일반시민이 참가자의 대부분이 될 것이다.

연일 미세먼지로 인해 불안과 불편을 겪어온 터라 환영한다. 일관성 없는 정부 정책으로 효과는커녕 불안만 가중됐는데 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공론화 장이 생기니 반가운 일이다. 미세먼지 원인과 해결 방안, 정책 우선순위 선호도, 정부와 서울시의 역할 등이 토론 결과로 요약되고 공개된다. 뿔난 시민들의 마음이 박원순식 소통으로 열리고 미세먼지 해법이 제시되길 기대한다.

지난해 6월 정부는 미세먼지 주범으로 화력발전소를 꼽았으면서도 당진과 강릉(삼척)에 2660㎿ 규모 총 4기의 신규 화력발전소를 또다시 추진 중이다. 지난해에는 고등어 구이가 문제라며 불안감을 조성하더니 이제는 중국의 영향이 크다며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국내 미세먼지 배출원 가운데 석탄이 차지하는 비율이 59%에 이른다는 국립환경과학원의 분석을 인용하면 정부는 고등어 탓, 중국 탓을 할 게 아니라 화력발전소를 중단하는 게 맞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 7일 경기 고양 국제 꽃 박람회를 찾은 시민들이 마스크를 착용한 채 꽃 구경을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 직속으로 미세먼지대책 특별기구를 신설하고 임기 내 국내 미세먼지 배출량을 30% 줄이겠다며 의지를 밝힌 만큼 정부 관계자도 이날 토론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한다. 실제로 정부가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이 많을 것이다.

얼마 전 서울환경연합이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시·도민 113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명 중 1명꼴로 미세먼지로 인한 건강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콧물, 재채기, 기침 등 호흡기 질환과 안구성, 피부성 질환 등으로 불편을 겪고 불안 증세까지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8명꼴로 차량 2부제 등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도 답했다. 시민들은 미세먼지 피해 당사자이지만 해결에도 적극적이었다.

미세먼지 해결, 시민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날 토론회가 중요한 이유이다. 미세먼지 원인과 대책은 많이 있지만 제대로 해결된 게 없고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다. 전문가들도 이해 정도와 입장 차이가 크고 정부 정책도 일방통행이 많다. 시민들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소통해야 한다. 미세먼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해와 참여를 구해야 한다. 이번이 좋은 기회다. 사전에 취합한 참여자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테이블별로 토론이 진행되고 숙의 과정을 통해 전체적인 결과를 도출한다고 하니 내용도 알차다. 시민이 주도하고 행정이 보조하는 박원순식 열린 소통으로 미세먼지 문제가 해결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이세걸 | 서울환경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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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마지막 날에도 광화문광장은 시민들로 가득 찼다. 그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 우리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12월31일 광장에 가지 않은 이들도 이유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 그곳에 있지 않으면 독감처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파고드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서라는 걸. 광장에서 외치고 토론하고 노래하지 않으면 악귀가 달라붙은 것 같았던 끔찍한 한 해를 차마 떨치지 못한 채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불길함이 엄습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2016년은 국가가 산적한 난제들과 씨름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간 시간이 아니라 멈춘 시간이었다. 아니, 지난 4년 전체가 동결된 시간이었고 2016년은 그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4년 동안 우리는 공익을 위한 제도, 권한, 법적 절차, 그리고 공공에 헌신한 대가로 공직자에게 주어지는 빛나는 명예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하릴없이 지켜봐야 했다. 국가의 단단한 껍질이 깨지면서 드러나는 썩어 문드러진 속살들, 그 속에 득시글거리는 해충과 기생충들, 그것들이 풍기는 악취를 꼼짝없이 지켜보고 냄새 맡아야 했던 우리 시민은 포르노 극장의 관객이었다. 국가라는 이름의 아우라에서 느껴지는 권위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서 국가의 우산 아래 모여들었던 ‘국민’은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 앞에 강제로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 즉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을 안겨줬다.

새해가 밝았지만, 세상은 아직 어둡습니다. 지난해 세밑까지 촛불을 들었을 때 시민들은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라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촛불은 ‘여기 사람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였습니다. 암흑에 빠져 있던 민초들을 꺼내야 한다는 구조 신호였습니다.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이었습니다. 새해에는 굳이 촛불을 켜지 않아도 대지와 광장의 목소리들이 곳곳에 퍼져나갔으면 합니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16년을 보내고 2017년을 맞은 새해 첫날 새벽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마르크스는 역사가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프랑스혁명의 공화국 정신을 무너뜨린 나폴레옹의 제정이 비극이라면 오직 삼촌의 명성 덕으로 권력을 차지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은 희극으로 본 것이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정부를 붕괴시키고 영구집권을 꿈꾼 박정희의 시대가 비극이었다면 아버지 덕에 집권한 박근혜 4년의 역사적 반동 역시 희극이다. 그러나 희극의 엑스트라가 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박 대통령이 우리를 호명했던 ‘국민’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했다. 광장으로, 광장으로 주말마다 몰려갔다. 그것만이 박 대통령이 지배했던 국가에서 벗어나는 길이었고, 뼛속 깊숙이 침윤했던 치욕을 털어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비로소 그곳에서 ‘자유로운 시민’이 되었다.

광장에는 동료 시민들 간 우애와 연대, 배려와 협동이 있었다. 가족, 친지, 동료와 혹은 홀로 나와서도 낯선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의견을 나누고 공감하고 춤췄다. 그곳에서는 여성, 청소년, 소수자들이 존중받았다. 중·고등학생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발언했다. 시민의 발견이었다. 광장은 정치적 각성의 장이었고 주말학교였으며 박근혜의 국가가 준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으며 따뜻한 공동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2016년은 최악의 시절이자 최고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어리석음의 시대이자 지혜의 시대였다. 불신의 세기이자 믿음의 세기였다. 절망의 겨울이었지만 희망의 봄이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지만 결국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광장을 떠나면 우리는 다시 고립된 개인으로 돌아간다. 광장의 우의와 연대는 광장 밖의 경쟁과 이기심으로, 배려와 협동은 차별과 배제로 대체된다. 광장 밖은 정글이며 정글에서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광장을 떠난 시민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닌, 원자화된 개인으로 살아간다. 이는 한국인의 오래된 트라우마를 떠올린다. 4월혁명, 6월 민주항쟁, 2008년 촛불집회는 기성 체제의 복귀로 끝났다. 기득권 세력은 시민이 광장에 있는 동안은 숨죽이고 있지만 광장을 떠나는 순간 바로 고개를 든다. 시민이 광장을 떠나는 날은 바로 그들의 세상이 다시 열리는 날이다.

다시 한국 사회가 광장과 광장 밖으로 양분된다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시민 떠난 텅 빈 광장이 우리의 일상이라면 그 빈자리는 선출되지 않은 재벌, 검찰, 국정원, 관료, 족벌언론, 기득권의 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의 이름을 도용해서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거나 함부로 국익이라고 정의한 사익을 위해 자신들의 금력과 권력을 동원할 것이다. 우리는 시민의 부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행이 저질러질 수 있는지 박근혜 정권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우리가 계속 투표하는 노예로, 유권자이기는 하지만 시민은 아닌 존재로 남아 있다면,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는 시인 김수영의 56년 전 한탄을 되풀이할 수 있다. 사실 지난 4년도 고립된 개인이 아무런 매개 없이 국가와 맞닥뜨린 결과였다. 개인과 국가 사이의 넓은 공간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의 놀이터로 바꾸어 놓은 결과였다. 그런 사태를 다시 겪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어디서라도 시민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가정, 직장, 학교, 동네에서도 시민적 권리를 보유한 당당한 주인으로서 발언하고 협동하며 용기와 우애를 보여야 한다. 우리는 동창회, 향우회 활동은 열심히 해도 노동조합원으로, 시민단체 회원으로, 자원봉사자로, 정당의 당원으로 참여하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가 참여하는 노동조합, 시민 참여가 활성화된 시민단체, 당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당 활동은 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기득권을 위축시킨다. 

잊지 말자. 불의한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광장에서 서로 연결된 시민의 힘이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이것이 꼭 물리적 광장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민적 공동체가 있다는 자각만 있다면, 그런 인식이 삶의 모든 측면에 스며든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지킬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이 탄생하고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4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도 시민으로서의 주권적 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유독 박 대통령의 무능과 실수, 실패에 관대했다. 선의를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 견제가 없는 어떤 권력도, 어떤 선의도 박근혜 정권처럼 될 수 있다. 정권 교체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박근혜라는 인물이 대통령이 아닐 때도 한국 사회가 특별히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떠난다고 자동적으로 검찰과 방송이 바로 서고, 재벌 독점 경제가 사라지고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정권 교체는 여러 번 있었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어떤 경우는 더 나빠지기도 했다. 

생쥐나라가 있다. 검은 고양이로 구성된 정부를 선출했다. 고양이는 좋은 법을 통과시켰다. 물론 고양이에게 좋은 법이다. 쥐구멍이 고양이의 발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커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쥐의 삶은 힘들어졌다. 마침내 더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은 검은 고양이를 퇴출시키고 흰 고양이를 뽑았다. 흰 고양이는 네모난 쥐구멍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네모난 쥐구멍은 둥근 쥐구멍의 두 배로 커졌고 생쥐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그러자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은 다시 검은 고양이를 선출했다가 퇴진시키고 또다시 흰 고양이를 뽑았고, 심지어는 반은 희고 반은 검은 고양이를 뽑기도 했다(토미 더글러스의 1962년 캐나다 의회 연설).

이 우화는 국가가 시민을 대표하지 않는 한, 국가를 구성하는 제도들이 시민의 통제와 감시하에 있지 않는 한 정권 교체는 지배 엘리트의 교체로 끝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은 정권 교체를 넘어서는 일이다. 사실 새로운 세상이 뜻밖의 선물처럼 오는 법은 없다. 낡은 것들은 발이 없어서 스스로 물러설 줄 모르지만 손은 있어서 해가 바뀌어도 우리 발목을 잡고 버틸 줄 안다. 아마 새해는 낡은 것들과 대결하는 해가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은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나라가 아니다. 이게 중요하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바꾸는 것이다. 시민적 결의만 있다면 못할 게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광화문에서 보여준, 황소처럼 센 시민의 힘을 기억하자.     

그래도 만에 하나 흔들린다면 광화문의 밤을 밝힌 12월31일 촛불의 바다를 떠올리자. 그리고 각자의 가슴에 촛불을 켜두자. 그러면 우리는 후퇴 없는 행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시위를 떠난 화살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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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이다. 한 해를 마감하기 사흘 전에 찾은 광화문광장에 부는 바람은 찼다. 하지만 가을 끝자락에서 겨울로 진입하던 때 뜨겁게 달궈졌던 광장의 열기는 칼바람에도 식지 않았다. 작가 최인훈은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고,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두 공간의 어느 한쪽을 가두어버릴 때 인간은 살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옳았다. 광장의 촛불은 밀실의 어둠을 몰아냈다. 죽어가던 민주주의를 살려낸 광장은 위대했다. 1000만개의 촛불로, 질서 있는 분노로, 저항의 함성으로 가득 찼던 광장은 명예혁명의 산실이었다. 헌정파괴와 국기문란을 일삼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 열차에 올려 태운 광장의 명령은 준엄하고도 단호했다. 세밑 광장은 앙시앵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작을 간구하는 외침으로 가득 차 있다. 70년간 쌓인 적폐를 걷어내고,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외침이다.

그런 광장이 막혔다면? 촛불시민은 역사의 패배자로 남고, 세상은 불의와 부패, 부정이 판치는 기득권 세력의 놀이터가 됐을 게 뻔하다. 끔찍한 일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에게 자신의 존재만 알게 하고(太上下知有之), 최악의 통치자는 백성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其次侮之)”고 했다. 그가 옳았다. 연설문 작성과 관료 인선, 정책 결정을 비선 실세에게 맡긴 대통령은 무능·무지·무책임했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 녹음파일을 복구한 검찰은 “(최순실과 박근혜의 통화 내용을) 10분만 들으면 ‘대통령이 어떻게 저 정도로 무능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독재자 아버지의 허상에 기대 권력욕만 키운 대통령은 비선 실세와 측근들에게조차 조롱의 대상이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청와대 인근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문화계 황태자로 불린 차은택은 국정조사 청문회에 나와 “최순실과 박 대통령은 동급으로, 공동정권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40년 지기 최순실은 “아직도 지(박근혜)가 공주인 줄 아나봐”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검찰도 국정농단 주범들의 관계를 ‘지시하는 가부장적 남편’(최순실), ‘아내’(박근혜), ‘사촌’(문고리 3인방)으로 명료하게 정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대통령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고, 저 혼자만 똑똑하고 나머지는 다 병신들”(김종필 전 총리)로 여길 정도로 오만했다. 그런 최악의 통치자를 업신여기지 않을 시민이 있다면? 아마 ‘혼이 비정상’일 게다.

알제리의 식민해방투쟁가 프란츠 파농은 “어리석은 권력은 민중의 목소리를 거부하다가 끝내 자멸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가 옳았다.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은 친일·독재를 미화한 국정 역사교과서,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 동북아 신냉전을 불러온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남북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 폐쇄 등을 일방적으로 강행했다.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게이트의 주범이면서도 자신의 책임은 털끝만치도 인정하지 않았다. 간교한 정치적 술수로 ‘막판 뒤집기’만을 노리다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 대통령을 시민들은 ‘죄의식 없는 확신범’으로 여길 뿐이다.

영국의 신학자 스티븐 체리는 “용서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내 손으로 뽑아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게 용서”라고 했다. 그가 옳았다. 세월호 침몰 당일 304명의 고귀한 생명이 수장될 때 올림머리를 하느라 90분을 허비한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구의역 19살 노동자와 백남기 농민이 죽어갈 때, 청년들이 ‘헬조선’을 외치며 신음할 때, 서민들이 생활고로 절망할 때 청와대 관저에서 미용주사를 맞고 ‘혼밥’을 먹으며 TV를 보던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탄핵심판 답변서에 “최순실 국정 관여 비율은 1% 미만”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에서 정상 근무” “측근비리가 발생한 역대 대통령도 탄핵 대상”이란 막가파식 논리를 편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 대통령을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뽑아내는 고통을 견디며 용서할 시민이 있다면? 아마 ‘박사모’ 회원일 게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해가 바뀌어도 잊지 못할 이름들이 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이들의 이름은 ‘1분 소등’ 시위 때 광장에 울려 퍼졌다. “최강서, 이운남, 이호일. 박근혜 당선 직후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의 이름입니다. 고창석, 이영숙, 권혁규, 박영인, 남현철, 허다윤, 조은화, 양승진, 권재근. 세월호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이름입니다. 김관홍, 최종범, 염호석, 한광호, 송국현, 백남기, 김주영. 박근혜 정권에서 희생된 분들의 이름입니다.” 촛불항쟁의 길을 터준 이들의 이름은 산산이 부서지고, 허공에 흩어졌어도 시민들은 설움에 겹도록 부르고 또 부를 것이다. 잊지 못할,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이름이기에….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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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농단에서 비롯한 대통령 탄핵 정국이 촛불에서 횃불로 옮겨붙었다. 부문별, 계열별 전문가 집단이나 협회, 단체들의 자잘한 이해관계를 넘어서 대한민국의 기틀을 혁신하려는 이 도도한 흐름은 국민·시민 주체가 만들어내는 촛불공론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이나 시민이라 불리는 주체들이 단일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따로따로 존재하지만 서로 강고하게 연대한 개별주체들이다. 이렇듯 파편화한 개인들을 엮어주는 공론장은 소셜미디어로 무장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일궈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거대한 퍼포먼스와 섬세한 몸짓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내는 시민운동가와 문화예술인들의 역할도 매우 크다.

탄핵안 가결 이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변혁의 에너지를 지켜내는 일은 100만 촛불의 몫으로만 남겨진 것은 아니다. 그 힘을 연결해주는 매개자들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업이 더욱 중요한 시점이다. 한겨울 추위가 강해질수록 현장을 지키는 문화예술인들의 강단있는 활동이 도드라져 보인다. 단 한 명의 입건 사례 없이 평화롭게 이어온 촛불집회는 공연을 매개로 한 정서적 공감의 장이다. 그것은 장르와 세대를 넘어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게 만드는 예술의 역할을 재확인시켜준다. 민중가요와 대중가요가 공존하는 촛불문화제는 투쟁의 장을 축제의 장으로 확장시켜 놓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이 12일 서울 대치동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 사무실 앞에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과 관련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특검에 고발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여기에 더해서 시각예술가들의 다양한 표현물들이 집회장을 풍요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은 텍스트 작업은 물론 걸개그림과 포스터, 깃발, 퍼포먼스, 스티커,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풍자와 비판정신 가득한 작품들로 광화문광장을 예술의 거리로 만들고 있다. 100만의 촛불파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퍼포먼스여서 예술적 이벤트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광장의 갤러리 ‘궁핍현대미술광장’을 열고 개관전 ‘내가 왜’를 시작했다. 촛불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공론장을 기록하고 그것을 재해석하고 확산하는 예술적 소통공간이다.

이제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마음은 국가위기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넘어 이성적인 합의로 진화하고 있다. 이번 일의 초기부터 광장에 자리 잡고 광화문텐트촌을 꾸리고 있는 예술인들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집회 현장의 공연 및 전시 프로그램을 통하여 광장의 에너지를 집결하는 한편, 그 너머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는 문화예술 개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론 보도가 아무래도 비리의 폭로에 주력하느라 차분한 성찰과 대안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들의 광장토론은 성숙한 시민사회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이번 국정농단 사건이 특히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과 사업 분야에 집중해 있다는 점에서 문화예술인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 예술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돌았다. 민관협치 개념으로 출범했던 예술위원회는 오작동을 연발했다. 공공기관의 인사 문제 또한 무방비로 농단의 무대로 전락했으며, 문화융성의 이름으로 깨알 같은 사익편취가 만발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는 동안 문체부의 행정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행정적 과실 유무 여부를 떠나서 공직자 윤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참담하기 그지없으니, 이제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도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시 논의할 때가 왔다.

국가단위 행정을 지자체단위 행정으로 세분화·지역화하고, 아카데미와 시장과 행정이 주도하는 제도예술과 그 바깥 비제도예술의 공존과 균형을 맞추며, 예술위원회를 되살려 민관협치를 복원하고, 기관장 인선 관련 전문성 강화 및 국정농단의 비리 관련 부역행위에 관한 행정적·윤리적 책임을 묻는 일 등 무수한 사안들이 있다. 나아가 국정 전반에서 문화예술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재구조화 논의가 절실하다. 지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최순실은 현 정권의 비선 실세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도처에 똬리 틀고 있는 모순덩어리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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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해자는 미발표 근작시 ‘여기가 광화문이다’에서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자고 우리는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이것은 지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수많은 시민들의 공통적인 심경일 것이다.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빛이 사방을 덮어 세상 곳곳으로 퍼진다는 광화문”으로 모이는 까닭은 명백하다. 세습권력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충성해온 직업정치인, 관료, 언론, 각종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배체제를 탄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연민과 분배와 정의가 얼어붙은 사이/ 농촌은 해체되고 청년들은 미래를 빼앗기고 노동자들의 삶은 망가져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고 분노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에게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되는 세상을” 열자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경이롭게도, 토요일의 광화문 풍경은 우리가 평소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 한국 사회가 아니다. 거기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로 충만한 공간이다. 같은 목적을 갖고 나왔기 때문에 그곳이 환대의 장소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엄청난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안전을 배려하여 몹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뭐든지 기꺼이 남에게 양보하려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바로 어제까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뿐만 아니다. 시위가 열리는 광장에는 개인 돈을 들여 마련한 촛불이나 핫팩을 참가자들에게 열심히 나눠주는 이들이 있고, 자기 장사는 접고 차와 음식과 떡볶이를 무료로 나눠주는 소상인들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여기저기서 임시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팻말을 들고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다.

놀라운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다. 시위가 있는 날은, 가령 청와대 근처의 도로는 경찰차들이 철벽처럼 길을 막아놓고 있는 탓에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동네, 특히 세검정 일대의 주민들은 시위에 참가하려면 걸어서 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중간에 자하문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몇몇 인근 주민들이 자신들의 승용차를 가지고 나와서 터널 구간을 무료로 태워주는 일종의 셔틀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내놓고 시위에 참가하고, 참가를 독려하는 이런 시민들의 이야기들을 들을수록 우리가 결코 ‘이상한’ 대통령 하나 때문에 광화문에 모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사람들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제는 썩어문드러진 구체제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말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 세상은 어렵고 복잡한 말로 묘사할 필요가 없다. 주말의 광장에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과 지혜가 놀랄 만큼 선명하게, 풍부하게, 강력하게 분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 오른 어떤 밴드 가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옛마을운동”이라고 노래 불렀다. 그 노래의 뜻은 일찍이 박정희 정권이 앞장서서 유포시킨 ‘새마을정신’이란 실은 황금물신주의를 조장하고 (농촌)공동체를 와해시킨 원흉이었고, 따라서 지금은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서로 돕고 살았던 ‘옛마을’의 정신을 되살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나라 정치인들이 ‘밥값을 못하고’ ‘서비스 정신’이 몹시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꼬집고, “서비스를 제대로 못하는 업체는 갈아치우는 게 당연하다”고 읊조렸다.

주말 광화문광장에서 듣는 발언은 실로 감동적인 게 한둘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를 또박또박 설명하는 어린 학생들과 시골에서 온 할머니, 늙은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등등. 너무나 수준 높고 품위 있는 언어가 표출되고 있는 이런 장면 앞에서 새삼 느끼는 것은 지금과 같은 형태의 대의 민주주의 정치는 이제 더는 다수 민중의 민주적 열망과 지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의 광장과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주장하는 게 있다. 즉, 나라의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일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1987년 6월이나 2008년 광우병 파동 때의 시위 장면에 비해서 한결 더 구체화된 민주주의적 요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 결정의 주체는 민중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지금 광장에서 울려나오는 구호 가운데는 쌀값문제, 노동탄압, 인권 및 환경문제 등등 개별적 이슈에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통령의 탄핵문제에 집중돼 있으며 그와 동시에 재벌문제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가 크게 공감을 얻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 대다수 시민들 사이에서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헬조선’으로 돼버린 것은 무엇보다 소위 정경유착, 즉 정치가 금권에 의해서 유린·농락되어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상식이 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닌가? 정치뿐만이 아니다.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윤리적 기초를 수호해야 할 언론, 학계, 사법부, 그리고 검찰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이제 대다수 시민들은, 아이들까지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2016년 겨울, 우리의 최대 과제는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시위나 봉기는 결국 일시적이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나 법을 만들어 민중의 민주적 열망이 지속적인 생명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제도와 법을 만들거나 개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시민들 자신이어야 하며, 따라서 ‘시민의회’든 ‘시민주권회의’를 통해서든 ‘시민권력’의 힘으로 나라의 틀을 새로 짜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지금 광장을 밝히는 촛불의 의미를 옳게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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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에 걸친 주말 촛불집회는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비롯해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지난 2개월간 정치는 여의도가 아니라 광화문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청와대와 부역자들이 여전히 파렴치하게 버티고 있으니 주말 촛불의 거센 파도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겨울의 한파를 뚫고 완전히 새로운 봄이 올 때까지 거침없이 나아가야 한다.

정치권은 여전히 그들만의 셈법으로 거센 파도의 끝자락에 슬며시 올라타 자신의 깃발을 꽂을 궁리를 하고 있으나, 광장의 시민이 4·19혁명, 1987년 6월항쟁의 한탄스러운 뒷마무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 ‘죽 쑤어 뭣 주는’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끝낼 때까지 끝나지 않은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촛불 이후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는 ‘광장의 열기와 지혜를 어떻게 사회발전 동력으로 수렴할 것인가’이다. 지난 2개월간 광장정치의 특징은 3가지로 요약된다. ‘체제혁신에 대한 염원, 자기 조직화된 질서, 그리고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이다.

제7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높이 8.5m의 촛불 트리가 세워졌다. 서성일 기자

첫째, 광장에서 표출된 체제혁신에 대한 불타는 염원은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참담한 과거에 대한 각성에서 온 것이다. ‘미래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이상적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갑자기 닥쳐와 삐거덕거리던 낡은 구조는 순식간에 작동을 멈추고 무고한 희생자가 양산될 것’이라는 섬뜩한 통찰로부터 온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엔 세월호 참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자살, 도탄에 빠진 청년들, 무한경쟁의 입시지옥, 그리고 나쁜 사람들이 출세하고 선한 사람들이 제거되는 구체제를 타파해야 한다는 열망이 불타고 있다. 광장의 혁신은 일상화되어야 한다.

둘째, 혁신에 대한 염원이 과거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면, 자기 조직화된 질서는 오늘의 지혜를 뜻한다. 평상시 같으면 동네 골목에서도 행인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광장에서는 약간의 실례에도 양해를 구한다. 빽빽한 지하철에서도 배낭을 등에 메고 남들에게 불편을 끼치던 사람들이 종각역, 광화문역에서는 배낭을 다소곳이 손에 든다. 어떤 힘이 광장을 특별하게 만든 것인가? 자발적으로 조직화된 열린 공간의 신성함,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존중, 그리고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방치한 주권자로서의 자기 회한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관계의 질서와 지혜는 일상으로 침투해야 한다.

셋째, 대의정치에 대한 문제의식과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은 광장이 성취하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상이다. 광장에서는 ‘박근혜 퇴진’을 넘어서서 우리 자신과 후대의 삶을 어떻게 조직화할지에 관한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제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광장과 주변의 열린 공간들은 정치, 문화, 교육, 복지, 통일 등 사회전반에 걸쳐 창발적인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표출하고 있다. 직접적 참여도 일상화되어야 한다.

촛불 이후, 우리는 밑으로부터 창발한 광장정치의 특성들을 일상화, 내면화해야 한다. 광장에서 발아한 소중한 씨앗들을 우리의 삶 전반에 파종하자는 것이다. 박근혜와 부역자들이 물러나고 몇 가지 진실이 밝혀지면 된 것이라는 설익은 종결은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고, 늘 새로이 직조(織造)되어야 하는 것이다. 체제혁신에 대한 열망, 스스로 조직화된 질서, 직접민주주의의 거대한 실험을 계속할 수 있는 사회적 틀을 만들어내야 한다.

인구가 5000만명이 넘는 나라에서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참여가 가능하겠느냐는 회의론이 있지만, 불가능할 것도 없다. 참여의 구조를 체계화하는 것은 고도로 발달한 우리의 네트워킹 기술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시민이 삶의 1% 이상을 항상적으로 정치에 투자함으로써 올바른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에 관여하고 감시하며, 부패하고 무능한 자를 언제든지 소환하는 참여의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1%를 미래에 투자하여 우리 아이들이 인간다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머뭇거릴 일이 있겠는가?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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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화면에 코를 박은 채 히죽거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정신을 문득 차려보니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를 흘끔거리며 쳐다본다. 민망함을 수습해볼 요량으로 쓸데없는 말을 건넸다. “<더 케이투>(배우 지창욱이 최근 출연한 드라마) 보세요?” 말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반색하며 손을 모아 쥐었다. “대~박이죠. <힐러>도 보셨어요?” 안 그래도 지창욱에 ‘꽂혀’ 그의 전작을 밤마다 몰아 보고 있던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몇십분 전만 해도 “약속은 하고 오신 거냐”며 심드렁하게 묻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곰살맞게 변해 있었다. 심지어 서랍을 열고는 초코바까지 내놓았다. 취재원의 사무실에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애매하고 어색하던 상황은 순식간에 십년지기의 만남처럼 화기애애해졌다.

드라마 하나로 생면부지의 남들과 대동단결했던 경험은 꽤 여러 번 있다. 올 초 <태양의 후예>가 방송됐을 때도 그랬다. 찜질방 TV 앞에 제각기 눕거나 퍼질러 앉았던, 일면식도 없던 ‘우리들’은 유시진이라는 이름 아래 맥반석 달걀을 나눠 먹으며 든든한 유대감을 다졌다.

‘할 일 없고 한심한 아줌마들이나 즐기는 하위 문화’라며 드라마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판단이야 자유지만 드라마의 미덕을 폄훼하진 말자. 당대의 욕망과 무의식을 반영하는 드라마를 통해 우린 시대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드라마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기도 한다. 대사 한마디가 영혼을 뒤흔들어 놓으며 인생의 큰 가르침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이 때문에 유명 인사나 스타가 나와 같은 드라마를 즐긴다면 괜히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히잡을 쓰고 만면에 웃음 띤 얼굴로 누군가에게 “<태양의 후예>도 보셨느냐”고 묻던 박근혜 대통령의 그 벅찬 심정. 안다. 나도 무수히 느껴봤으니까.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17일 (출처: 경향신문DB)

드라마에 빠지고 즐기는 것은 보편적인 정서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한하다. 드라마를 그렇게 사랑하는 대통령이라면 공감능력이 정상 수준은 될 법한데 공감은 고사하고 일상적 의사소통도 안된다. 100만명 넘는 국민이 매주 청와대 코앞에서 대놓고 외치는 소리가 ‘외계어’(알아듣기 어려운 신조어)로 들리는 게 분명하다. ‘길라임’이고 싶었으나 실상은 ‘별에서 온 그대’인 건가. 국민들의 말이 ‘외계어’로 들린다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드라마 주인공들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보시라.

먼저 유시진 대위다. “그럼 하나만 물어봅시다. 혹시 이게 마지막일지 몰라서…. 뭘 할래요? 당장? 하야할래요? 고백할래요?” 매주 광화문광장에 나서는 ‘오해영’도 외친다. “대통령이 꼼수 부리니 좋은 거 하나 있네. 광화문에 계속 나오고 싶어진다는 거. 일찍 일찍 좀 하야해라. 사과는 바라지도 않는다. 나 뚜껑 열린다. 진짜.” 함께 나온 길라임의 남자 ‘김주원’도 경고한다. “내가 이 밤중에 여기 왜 이러고 있겠냐. 알고 싶어 온 거잖아. 그러니까 네 말만 하지 말고 대답 좀 해라. 7시간 동안 뭘 했는지. 경고하는데 다시는 딴 놈 핑계 대며 피해자 코스프레 하지 마. 내려놓는 척하며 말장난도 하지 말고. 두 번 다시 그런 담화문 갖고 나 찾아오지 마.”

형편없는 새누리당을 향한 천송이의 일침이다. “이번에 나라꼴이 바닥을 치면서 기분 참 더러웠는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어. 사람이 딱 걸러져. 진짜 국민 편과 국민 편을 가장한 ‘척’.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라는 하느님이 주신 큰 기회가 아닌가 싶다.”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즐겨 봤다는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 ‘강마에’도 엄청 화가 났다.

“당신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뭐라 그러는 줄 알아요? 구제불능, 민폐, 걸림돌. 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렇게 불러주고 싶어요. 똥! 덩. 어. 리.”

문화부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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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그라’는 지난 한 주간 트위터상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가 됐다. 최순실 국정농단 관련 키워드가 6주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트위터코리아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와 함께 21일부터 27일까지 트위터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들 중 주목할 만한 단어를 분석해 29일 발표했다.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는 ‘비아그라’였다. 청와대가 세금으로 비아그라와 미용 주사제 등을 대량 구입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은 “수행원 고산병 때문에 비아그라를 구입했다”고 해명했지만, 청와대가 고산병 치료제를 별도로 구입한 사실도 드러나면서 논란이 지속됐다.

전국에서 190만명이 모인 26일 ‘촛불집회’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트위터에서는 광화문광장에 모인 150만 인파의 촛불 파도타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의미로 시작된 1분 소등 퍼포먼스, 가수 양희은과 150만명의 ‘아침이슬’ 합창 장면 등이 주로 공유됐다. 촛불집회가 처음 시작된 9월27일부터 이달 26일까지 ‘최순실 게이트’ 관련 키워드는 약 1600만건에 달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2일 국무회의에 참석해 국무위원 전원 사퇴를 주장하면서 ‘국무회의’ 역시 핫 키워드가 됐다. 박 시장은 트위터를 통해 “무력감과 분노감으로 국무회의장을 박차고 나왔습니다”라며 “대통령의 즉각 하야를 주장하는 국민의 뜻을 분명 전했습니다”라고 전했다.

검찰이 삼성 미래전략실과 국민연금관리공단을 압수수색하면서 ‘국민연금’에 대한 언급량도 급증했다. 검찰은 국민연금이 손실을 감수하면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하는 대가로 정권 및 최순실씨가 이익을 취했는지 여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후쿠시마’가 최순실 게이트와 무관한 키워드로는 유일하게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22일 새벽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규모 7.4의 강진이 일어났지만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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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거의 한 세기를 살아낸 ‘혁명가’의 생애는 이렇게 저물었다. 지금은 까마득하게 잊혔지만, 나에게 카스트로는 88 서울올림픽에 대한 기억과 함께한다. 여전히 반공주의 군사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한국의 서울에서 평화와 화합의 상징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사실에 대해 국제사회는 논란에 빠져 있었다. 광주의 민주화 요구를 총칼로 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는 올림픽을 유치함으로써 정권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고자 이들은 1983년부터 상계동을 비롯해서 오금동, 암사동, 신정동에 있던 서울의 ‘달동네들’을 ‘도시 미화’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철거했다.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고 쫓겨난 이들은 ‘도시 난민’이 되어서 고속도로변에 가건물을 짓고 목숨을 겨우 이어가야 했다. 군부독재에 반대하고 민주화만 이야기해도 ‘빨갱이’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과 중국은 올림픽 참가를 공식화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카스트로는 올림픽조직위원장에게 서신을 보내 쿠바의 올림픽 불참을 알리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카스트로의 서신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서울올림픽 아카이브에서 읽을 수 있는데, 놀랍게도 카스트로는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과 올림픽을 빌미로 이루어지고 있는 폭력적인 철거를 지적하면서 이런 나라에서 행사를 개최한다면 올림픽 본래의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쿠바 아바나대학 학생들이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의 사망 소식이 발표된 26일(현지시간) 캠퍼스 내 추모소에서 애도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아바나 _ AP연합뉴스

물론 그 시절 전두환 정권은 이런 쿠바의 결정을 “북한의 사주” 때문이라고 일축했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는 카스트로의 서신은 ‘공산주의 국가’ 쿠바에 대한 편견을 흔들어놓는 것이다. 카스트로가 표명한 입장은 한국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고, 올림픽을 글로벌 자본주의의 확산에 이용하려 했던 이들에 대항해 제3세계 국가들의 연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신이 제기한 연대는 오늘의 사정에 비추어보면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세계는 카스트로의 입장과 반대로 움직여왔다.

그러나 카스트로가 1980년대에 주목했던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6년 한국은 여전히 민주화 운동 중이다. 주말마다 광화문광장은 대통령 퇴진과 탄핵을 외치는 ‘민주시민들’로 가득 찬다. ‘광야에서’가 울려 퍼지는 광장은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규모와 양상에서 비교 불가하지만, 정서는 반복적이라는 생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반복의 정서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카스트로가 언급했던 그 1980년대이다. 1980년대는 한국에서 급진주의의 절정기였다. 광주의 경험은 이른바 ‘운동권들’에게 객관적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이론’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한계는 컸지만 ‘사회구성체 논쟁’은 이런 맥락에서 튀어나온 지적 시도였다.

광화문광장에 모인 이들 중 상당수는 1980년대를 통과했을 것이다. 시위 현장에서 이들에게 익숙한 노래들은 1980년대를 풍미했던 ‘민중가요’이겠지만, 광화문광장에 울려 퍼지는 노래들은 ‘인기 가수들’이 부르는 ‘사회의식’을 갖춘 노래들이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농성 중에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상’을 불러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1990년대의 노스탤지어를 재현하는 <응답하라>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가 대표적인 민중가요 ‘바위처럼’을 부르면서 시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과 대조적이다.

이런 변화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대중문화가 특정한 ‘운동권 문화’를 대체하면서 민주주의의 이념이 무한한 확장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마치 아베 정권이 안보법 개정을 예고했을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일본 청소년들이 힙합을 부르면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주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 지점에서 광화문광장에서 일렁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확고하게 ‘자유민주주의’로 수렴한다. 부정적으로 본다면, 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는 문제에 발본적으로 접근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급진주의를 선제적으로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합법적 평화시위’를 규범화해서 강제하는 일부의 태도는 이런 급진주의에 대한 적대 내지는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최근 세계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극우화의 원인으로 이런 급진주의의 소멸을 꼽고 있다. 한때 세계의 절반을 차지했던 급진주의는 허울 좋은 ‘소비자주의’를 통해 적대시되고 거부되었다.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든 글로벌 자본주의라고 부르든 이 양상이 초래한 불평등은 허무주의적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 결과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무엇이었던가. 지금 청와대에 계신 ‘그 분’이야말로 1980년대의 급진주의가 보수주의에 밀려나면서 벌어진 참사가 아닐까. ‘그 분’을 청와대로 보냈던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1970년대 같은 ‘정경유착’이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도 가능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그들에게도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민주주의는 일단 가동되는 순간 멈출 수 없는 엔진이다. 생전 카스트로가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무엇을 보았든, 이제 민주화 운동은 하나의 기호로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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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지난 11월4일 싸뒀던 여행 가방을 풀고 노숙 가방을 싸서 광화문광장으로 나와 텐트 노숙을 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에 의해 블랙리스트로 찍힌 문화예술인 7500명이 시국선언을 하던 날이었다. 첫날 텐트 20여 동을 모두 경찰에게 빼앗기고 광장에서 맨몸으로 자야 했던 때가 어제인 듯한데 벌써 20일째다. 처음엔 문화예술인들과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사람들 몇이 시작했던 작은 텐트촌이 이젠 60여 동의 다양한 개인 단체들의 텐트와 마을창고, 마을회관 등이 들어선 작은 마을이 되었다.

각각의 텐트에는 입구마다 주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개성 있는 현판들이 달렸다. 이제 작은 마을 하나를 이루었지만 전국의 수많은 거리와 광장과 함께 연계해 2011년 9월 세계 경제의 중심인 뉴욕 월가를 점령하고 ‘1%에 맞선 99%의 항쟁’을 꿈꾸었던 즈카티 공원이나, 같은 해 ‘아랍의 봄’을 이끌었던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처럼 넓혀 갈 꿈을 꿔본다. 그렇게 광장과 거리로 모인 노동자 민중시민들의 직접 민주주의만이 박근혜 정권을 제대로 심판하고, 한국사회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단계로 진전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정무직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실제로도 그렇다. 11월12일 100만이 모인 거리와 광장이 있고 나서야 머뭇거리던 야권은 박근혜 퇴진 당론으로 슬며시 입장을 바꾸었다. 해체가 정답일 새누리당 내에서도 탄핵 주장이 나오고, 법원은 청와대 앞 도로에 대한 합법적인 행진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권력의 하수인 역할에 충실했던 검찰 역시 최순실과 안종범·정호성의 공소장을 통해 부족하나마 ‘거의 모든 혐의에 대하여 기소된 3인이 대통령과 공모 관계’였음을 적시하였다. 검찰 역시 박근혜씨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주범인 ‘피의자 박근혜’에 불과함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피의자 박근혜’가 아직도 국사를 보고받고, 국정에 대한 결정들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단 하루도 재앙이며 악몽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피의자 박근혜’에게 ‘영수회담’을 제안하고, ‘질서 있는 2선 후퇴’를 위해 거국중립내각을 얘기하는 야권도 악몽이 아닐 수 없다. 국민들의 비판으로 영수회담의 기회를 잃은 야당 대표가 ‘피의자 박근혜’가 ‘계엄령’을 선포할 수도 있다며 자신의 행보를 변호한다. 만약 실제로 그런 사람이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면 더더욱 ‘즉각 퇴진’을 요구해야 하지 않는가.

그 힘을 만들 수 있는 ‘거리와 광장’을 꿈꾼다. ‘피의자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심판을 넘어,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한국사회의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가치관의 혁명, 노동자시민 항쟁을 꿈꾼다. ‘안될 거야’, ‘어려울 거야’라고 제풀에 접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래, 우리 모두가 새로워지는 그 사회로 이제 그만 넘어가자’는 새로운 윤리의 혁명이 되기를 바라본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새로운 시대의 봄을 꿈꿔본다.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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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군중이 매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거리의 의회’를 열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능가하는 분노의 함성과 외침이 만추의 광화문광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드러난 ‘권력의 사유화’로 박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통치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듯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지도자는 국가를 이끌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1974년 7월25일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닉슨 대통령을 탄핵 소추한 하원 법사위원회에서 바버라 조던 하원의원은 “국민의 공적신뢰(public trust)를 배신한 대표는 탄핵될 수 있다”고 연설하였다. 대의 민주주의하에서 주권자인 국민은 대표에게 권력을 한시적으로 ‘위임’한 것이지 ‘신탁’한 것이 아니다. 대표는 주권자인 국민의 수탁자(fiduciary)가 아니라 대리인(agent)일 뿐이다. 수탁자는 피수탁자인 국민의 공익을 위해 정치권력을 행사하도록 위임받았지만, 위임받은 기간 동안 피수탁자인 국민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 면제된다. 반면에 대리인으로서 대표는 주인인 국민에 대해 엄격하게 책임을 지도록 기속(羈束)되며, 따라서 국민의 공적신뢰를 상실한 대표는 권력을 회수당할 수 있다. 대의 민주주의하에서 국민이 대리인인 대표, 특히 대통령의 권력을 회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주기적 선거를 통한 퇴출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탄핵제도를 헌법에 넣음으로써 입법부가 국민을 대리하여 공적신뢰를 상실한 대통령을 비롯해 대표들의 권력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난 19일 전국 60여 곳에서 열린 4차 촛불집회에 주최 측 추산 96만명(경찰 추산 26만여명)이 참여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부산 서면 촛불집회(왼쪽 사진)에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10만명이 참가했다. 대구 중구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열린 집회 참가자들은 ‘박근혜 퇴진, 새누리 해체’라고 적힌 현수막을 전달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오른쪽 위). 광주 집회에선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들이 도청 앞 분수대에 횃불을 켜고 열었던 ‘민주성회’가 재현됐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오는 26일 5차 촛불집회에 최대 300만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한민국은 미국식 탄핵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헌법 65조는 대표가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가 탄핵을 소추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검찰은 박 대통령이 최순실 일당과 범죄를 공모한 혐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특검에 의해 추가 범법행위가 밝혀지기 이전에도 탄핵 소추를 당할 수 있다.

탄핵은 헌법에 명시된 합법적 절차이나, 현 탄핵사태가 헌정위기로 발전할 것인가의 여부는 박 대통령의 대응에 달려 있다. 여야의 탄핵 소추 시도에 대해 박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의 충실한 ‘대리인’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 면제된 ‘수탁자’처럼 행동함으로써 자유 헌정주의의 기본 정신을 위반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국회가 탄핵 소추에 필요한 ‘적법한 절차(due process)’를 밟는 데 협조하지 않고 있다. 검찰의 대면조사를 거부하고, 탄핵 소추가 의결되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대통령 권한 행사가 정지된 기간 동안 과도정부를 대행할 국무총리의 임명도 거부할 태세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이 하원에 의해 탄핵 소추된 것은 그의 범법행위보다도 검찰의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를 방해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이 법이 충실하게 집행되도록 조치를 취할 의무를 지닌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인 제임스 매디슨은 “대통령이 헌법을 전복하려고 시도한다면 탄핵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닉슨은 헌법을 전복하려 함으로써 국민과 의회를 분노케 했고 퇴출된 후에도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이 갈수록 더 거대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것은 검찰의 대면조사를 거부하면서 최순실 사건 수사에 성실히 협조하고, 탄핵 시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겠다는 기존의 약속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 최고 공인으로서 지켜야 할 공적신뢰를 배신하였기 때문에 국민적 분노를 사고 있는 것이다.

지금 박 대통령에 대한 분노는 거리와 광장에서 분출되고 있다. 이제 거리에서 분출되고 있는 분노를 의회 대표들이 장내로, 의사당 안으로 끌어들여 처리해야 한다. 계속 ‘거리의 의회’가 ‘제도권 의사당’을 압도할 경우 국민적 분노는 통제불능 상태가 될지 모르며,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게 될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탄핵에 필요한 절차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국회와 검찰에 협조함으로써 이번 사태가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니라, 더 책임성 있는 민주주의로 전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노자는 “멈추어야 할 때와 장소를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知止不殆)”라고 가르쳐 주었다. 박 대통령은 이미 멈추어야 할 지점을 너무 멀리 넘어가 버려 위태롭게 되었다. 지금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만족해야 할 최적점을 발견하는 것이다(知足不辱). 박 대통령이 만족해야 할 최적점은 국민의 일반의사이다. 광장에서 표출되고 있는 국민적 요구에 응답하면 박 대통령은 닉슨처럼 치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임혁백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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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국민대각성의 시대다. 쇠고기 촛불 이후 영 꺼진 줄 알았던 촛불이 다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연일 봇물 터지는 보도에 국민은 아연실색, 분노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보수의 아성 대구도 그렇다.

지난 백년 우리나라에 정의가 승리할 절호의 기회가 몇 차례 찾아왔으나 우리는 한번도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기회주의자, 권력파들이 노상 승리하고 정의와 양심을 사랑하는 민주파는 패배하고 좌절해왔다. 그래서 ‘정의고 양심이고 소용없다’ ‘권력과 돈이 최고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이런 못된 풍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정의는 패배해 왔다. 우리가 선진국이 못되는 이유는 소득이 낮아서가 아니고 바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구조에 있다.

[시사 2판4판]사이비 (출처: 경향신문DB)

첫번째 기회가 해방 직후였다. 우리 국민이 얼마나 감격과 환희에 가슴 벅차하며 새 나라를 열망했던가. 그러나 많은 애국세력들이 신탁통치 찬반으로 나뉘어 분열하는 사이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들을 배격하고 친일파들을 몽땅 기용해서 권력을 잡았다. 일제가 김구 선생보다 큰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으나 실패했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일본 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모욕을 당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약산은 풀려난 뒤 사흘 동안 울었고 결국 이듬해 월북했다. 두번째 기회는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 때 찾아왔으나 민주당이 신파·구파로 분열·반목하는 사이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친일 군인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1년 만에 무너졌다. 민주주의는 파괴되고, 유신 폭압통치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광화문광장에 이승만·박정희 동상을 세우자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다. 세번째 기회는 1979년 박정희가 죽고 난 뒤의 ‘서울의 봄’. 그러나 전두환 쿠데타로 다시 좌절했다. 네번째 기회는 1987년 민주대항쟁으로 전두환 독재를 무너뜨림으로써 찾아왔으나 양김이 양보하지 않고 욕심부리는 바람에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번이 다섯번째 기회다. 네 차례나 실패했으니 이번만은 잘해야 한다. 분열과 욕심은 금물이다. 다시 천추의 한을 남겨선 안된다.

명백히 박근혜 대통령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뭘 잘못했는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아직 모른다. 두 차례 사과도 진실과는 거리가 먼 미봉책이며, 국회 방문도 미봉책이다. 찔끔찔끔 최소한으로 사과하고 지나가려 한다. 다급해지니 청와대에 각계 인사를 불러 경청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너무 늦었고 진정성도 없다.

맹자는 “왕이 큰 잘못이 있으면 간하고, 여러 번 간해도 듣지 않으면 왕을 바꾼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그랬지만 박 대통령은 잘못을 간할 만한 강직한 사람을 아예 옆에 두지 않았다. 이 정부 고위직이나 청와대에 바른말 하는 사람은 씨가 마르고 온통 간신배로 가득 찼다. 박 대통령은 심지어 장관의 대면보고조차 받지 않았다. 과거 기자회견 때 뒤의 참모들을 돌아보면서 “대면보고 필요하세요?”라고 묻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라. 대통령이 장관의 대면보고를 받지 않고 어떻게 국정 현황을 파악하며, 나라를 이끌고 갈 수 있을지.

국정은 이미 지난 몇 년간 표류해왔고, 공백상태였다. 장관과 공무원들은 대통령이 보고를 요구하지 않으니 속으로는 편하게 됐다고 생각하고 각자 알아서 권력자들 눈 밖에 나는 일만 없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창조경제는 원래 실체도 없고, 사기꾼 설치기 좋은 환경인데, 아니나 다를까 엉망진창이다. 대통령은 언제나 원고를 또박또박 낭독은 잘했으나 자유대화, 자유토론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대통령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그러니 지금 대통령 그만둔다고 국정공백 생길 리 없다. 오히려 빨리 하야하고, 새 대통령 뽑는 게 국정공백을 줄이는 길이다.

대통령 그만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다. 맹자가 말했다. “나라에 백성이 근본이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볍다(民爲本 社稷次之 君位輕).” 대다수 국민의 눈에 이미 박근혜는 대통령이 아니다. 외치·내치 구분해서 맡기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대통령은 해외에서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다. 대통령직 오래 유지해봤자 국정 혼란과 공백이 길어질 뿐이다.

박 대통령에게 마지막 남은 애국심이 있다면 국민에게 이실직고하며 용서를 빌고 하루빨리 하야해야 한다. 호가호위하면서 저질 정치를 해온 새누리당 친박들은 석고대죄하고 정계를 떠나야 한다. 야당은 이 문제를 미온적으로 대하지 말고 가차 없이 하야를 요구해야 한다. 오직 촛불, 민심이 천심이고 백성이 근본이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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