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자행한 공작정치의 증거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 규모와 내용이 상상을 초월한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을 동원해 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사찰하고, 공영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임직원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총선에 불법 개입하고, 문화계 블랙리스트 보고를 받은 정황도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과 한마디 없이 “안보가 엄중하고 민생이 어려운 시기에 국익을 해치는 일”이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문재인 정부의 전임 정권 적폐청산 작업은 “퇴행적 시도”라고 규정하고,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의 뻔뻔함에 소름이 돋는다.

[장도리]2017년 9월 29일 (출처:경향신문DB)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가 공개한 문건 중 국정원 작품으로 보이는 ‘야권 지자체장의 국정운영 저해 실태 및 고려사항’ 보고서를 보면 8개 광역 시·도지사와 23개 구청장 등의 신상과 동향이 자세히 적혀 있다. 예컨대 안희정 충남지사에 관해서는 “정부의 대북정책 비판 활동을 주도하고,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건설사업 반대해 찬반주민의 갈등 격화를 초래했다”고 적혀 있다. 문건은 기획재정부와 감사원 등을 통해 불이익을 줘서 안 지사 같은 지자체장을 제압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2011년 9월27일에 작성된 ‘KBS 관련 검토사항’ 보고서에는 김인규 당시 KBS 사장 등의 교체를 검토하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에게 시켜야 한다고 했다. 하나하나가 형사처벌감이다. 

2012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친이명박 체제’를 꾸리기 위해 관권이 동원된 정황도 있다. 2011년 12월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대통령실 전출자 총선출마 준비 관련 동향’ 문서를 보면 “대통령실 전출자 11명이 내년 총선 출마 준비 중이다. 이들에 대한 동향파악 및 지역 민원과 애로사항을 취합·청취할 대통령실 내 지원창구를 설치해 총선 전까지 한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적혀 있다. ‘대통령실 전출자’ 중 한 명이 당시 정무수석인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이다. 최근 정 의원이 ‘댓글정치의 원조는 노무현 정부’라며 이명박 정부 방어에 적극 나서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국정원과 사이버사 댓글작업 등으로 이명박 정부가 대선에 불법 개입한 혐의에 관해서는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비위 의혹이 추가로 제기되고 범죄 증거가 나온 이상 검찰 수사 확대는 필수적이다. 검찰은 좌고우면할 것 없다. 민주주의와 헌법을 우롱한 이명박 정부 공작정치의 진상을 규명하고 엄벌해야 한다. 이 전 대통령도 국민에게 죄상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국익을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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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시절 여론조작을 위해 민간인을 동원해 댓글부대를 운영한 민병주 전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장이 19일 새벽 구속됐다. 원세훈 원장 시절인 2010~2012년 외곽팀을 운영하면서 불법 선거운동과 정치관여 활동을 하도록 하고 수십억원의 활동비를 지급한 혐의다. 그는 2013년 박근혜 정부 검찰 수사에서 구속을 면했지만 4년 만의 재수사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 때 광범위하게 진행된 추악한 여론 공작 실태는 도대체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이번엔 2012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이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작업을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았다는 증거가 담긴 군 내부 문건이 새롭게 공개됐다. 국방부 2급 비밀문서인 ‘2012 사이버 심리전 작전 지침’이란 문건에는 ‘총선·대선 개입’이라는 활동 목표가 분명히 적시돼 있다. 국정원 외에 국방부 장관까지 군 댓글공작을 진두지휘한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19일 오전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가진 민주당 적폐청산TF(태스크포스) 회의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고소·고발한 취지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수준일 줄은 몰랐다.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알몸 합성사진에 얼굴이 오른 배우 김여진씨는 “그 추함의 끝이 어딘지 똑바로 눈뜨고 보고 있기가 힘들다”고 했다. 시민들의 생각도 그와 똑같다. 국정원 심리전단은 합성 사진 제작·유포 계획을 상부에 보고하면서 ‘특수공작’이란 표현까지 썼다. 좌파 낙인을 찍은 문화예술인을 지원대상에서 배제하는 방식의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와는 전혀 다른 악질적 행태이다. 시민 세금으로 민주주의의 기초를 파괴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난도질했으니, 국가기관의 탈을 쓴 범죄집단이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은 “무슨 법적 권능과 근거로 국정원 기밀사항을 뒤지느냐. 제대로 하려면 국정원이 도청했던 이전 정권 때 일도 공개해야 한다”며 반발했다고 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로만 봐도 청와대와 국정원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정원의 문화예술인 퇴출공작은 ‘VIP(대통령) 일일보고’ 형태로 청와대에 보고된 사실도 드러났다. MB의 수족인 원세훈 전 원장은 이런 혐의로 이미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도대체 뭐가 더 나와야 순순히 범죄를 인정할 것인가. 재임 중 입만 열면 ‘국격’ 타령이더니 정작 자신이 나라를 망신시킨 대표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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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파기환송심에서 정치개입과 선거개입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돼 징역 4년을 선고받고 30일 법정 구속됐다. 당초 2심의 징역 3년형보다 처벌 수위가 높아진 것이다. 사필귀정이다.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김대웅 부장판사)는 원 전 원장 재직 당시 국정원이 장기간 조직적으로 정치·선거에 관여했다는 검찰의 기소 내용을 받아들였다.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하고 있다. 공무원은 직무 영역에서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정치적 중립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국정원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나 국정원은 막대한 예산과 광범위한 조직을 거느린 핵심 정보 기관이다. 국정원이 정치적 중립을 잃는 순간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원 전 원장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저버리고 이명박 정부와 여당엔 유리하고, 야당에는 불리한 내용을 인터넷에 전파하며 여론을 조작했다.

원세훈 전국가정보원장이 30일 서울 서초동 고등법원에서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원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3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돼 구치소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대선을 앞두고는 야당 후보 낙선 운동까지 벌였다. 2012년 말에 치러진 18대 대선에서 여당인 박근혜 후보와 야당인 문재인 후보 간 득표율 차이는 3.6%포인트에 불과했다. 원세훈 국정원의 불법 활동이 민의를 왜곡해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에서 공무원 정치 관여 행위의 기준을 제시했다. 국정홍보성 글이나 현직 대통령을 옹호하는 게시글이어도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반대로 이어지면 정치관여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에서 특정 게시글에 찬성·반대를 클릭한 행위 1200회, 이외의 인터넷 게시글과 댓글 2027회를 정치관여 행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또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사용한 인터넷 사이트 계정과 트위터 계정에서 이 같은 글 게시와 찬반 클릭이 장기간 반복된 것으로 볼 때 불법 행위가 능동적·계획적으로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원 전 원장은 이런 불법을 저지르고도 북한 선전선동에 대응해 국가안전을 지키기 위한 사이버활동이라고 궤변을 토했다. 문제의 인터넷 글에 대해서는 모르는 일이라며 1심부터 파기환송심까지 내내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이런 인물이 국정원장이었으니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원훈에 따라 국가와 시민에게 진실로 충성한 국정원 직원들은 이명박 정부 내내 좌절감이 컸을 것이다.

댓글 사건은 원 전 원장의 범죄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 검찰은 국정원 직원 외에 민간인 댓글부대 운용 등에도 원 전 원장이 개입했다고 보고 있다. 원 전 원장의 배후에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청와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국정원 댓글공작을 한 민간인들의 상당수는 ‘늘푸른희망연대’ ‘한국자유연합’ 등 이명박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인사가 설립하거나 이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관변단체들인 것으로 이미 드러났다. 박근혜 정부 초기 검찰의 국정원 댓글 수사를 방해한 세력에 대한 수사도 필요하다. 당시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좌천됐고 채동욱 검찰총장은 내밀한 사생활이 언론에 폭로되면서 사퇴했다. 국정원 적폐청산 TF가 진상조사 중인 이명박·박근혜 정부 국정원 당시 적폐는 13건에 이른다. 성역은 있을 수 없다. 검찰은 국정원의 정치공작을 철저히 파헤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해야 한다. 그것이 국정원을 바로 세우고, 추락한 검찰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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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민정비서관실 캐비닛에서 뒤늦게 발견된 삼성 경영권 승계 관련 보고서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지시로 작성됐다는 현직 검사의 증언이 나왔다. 이른바 ‘캐비닛 문건’을 모른다는 우병우 전 수석의 발언과 배치된다. 25일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이영상 검사(대검 범죄정보1담당관)는 민정비서관실 선임행정관으로 근무하던 2014년 7~9월 당시 민정비서관인 우 전 수석의 지시로 삼성 관련 문건, 메모, 보고서 등을 작성했다고 증언했다. 이 검사는 “민정비서관이 최종적으로 기조를 결정하고 보고서를 승인한 것이 맞냐”는 특검의 질문에 “그렇다. 제가 임의로 혼자서 작성한 것은 없다”고 답했다. 공판에서는 이 검사가 보고서 작성과정에서 남긴 메모도 공개됐다. 삼성 경영권 승계 국면 → 기회로 활용. ‘삼성의 당면과제는 이재용 체제 안착. 윈윈 추구할 수밖에 없음’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청와대에서 발견된 박근혜 정부의 '삼성 경영권 승계'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한 의혹을 받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24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자신의 속행 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 전 수석의 음험한 손길이 민정 업무와 거리가 먼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에까지 뻗쳤다니 놀랍다. 작성 시점과 내용으로 추정컨대 민정비서관실의 삼성 보고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보고돼 국정농단 세력이 범죄를 모의하는 데 활용됐을 수 있다. 정권과 삼성이 뇌물을 주고받으며 윈윈하자는 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기본 구조다. 그런데도 우 전 수석은 보고서 내용은커녕 존재조차 모른다고 잡아뗐으니 그 뻔뻔함에 기가 찬다. 우 전 수석은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 청사에서 열린 자신의 재판에 출석하다 ‘캐비닛 문건의 존재를 아는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언론 보도를 봤지만, 무슨 상황인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고 답했다. ‘법 미꾸라지’인 우 전 수석이 후배 검사의 법정 증언까지 나온 상황에서 어떤 해괴한 논리와 변명을 들이댈지 궁금하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에는 국정원도 동원됐다.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은 당시 이헌수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으로부터 삼성물산의 대주주이면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하는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에 관한 정보를 수시로 건네받았다.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은 예산과 인사, 기획 등을 담당하는 핵심 보직이다. 특검에 따르면 이 실장은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 한국 관련 (상황을) 관리하고, 내부 상황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다른 친구를 통해 더 알아보겠다. 추가 내용은 다음에”라는 내용의 문자도 장 전 사장에게 전송했다. 삼성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국정원이 흥신소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과거사 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는 국정원은 국정농단 부역자들의 비리도 철저히 밝혀 엄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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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국가정보원장 후보자가 29일 국회 정보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은 정권을 비호하는 조직이 아니다. 앞으로 국정원은 국내 정치와 완전히 단절될 것”이라고 밝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제도화해서 실천하느냐는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국정원은 정권 유지 및 재창출의 수단으로 악용됐다. ‘댓글 사건’이 보여주듯 국정원은 2012년 대선에 불법 개입했고 그 덕을 본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이 되었다.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과 사찰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지난해 국정농단 사건 국회 국정조사 과정에서는 국정원이 양승태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를 사찰한 정황이 드러났다. 멀쩡한 공무원을 간첩으로 몰다가 들통나고, 극우 단체에 자금을 대주며 관제 데모를 지시한 정황도 있다. 서 후보자는 “취임하면 국민 신뢰를 잃게 만든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옳은 말이다. 국정원 개혁은 과거의 불법 행위를 조사해 반성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

서훈 국정원장 후보자가 29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그러나 국정원 개혁은 말처럼 쉽지 않다. 국가 기밀을 다루고 보안을 요하는 조직 특성상 기본적으로 외부 감시와 견제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국정원 개혁은 늘 셀프로 이뤄지고,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됐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국정원은 요원들의 정부·공공기관 출입을 금지하고 관련 조직을 폐지·축소하겠다고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게다가 서훈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발언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 공약과 다소 배치되는 내용이 있어 정부의 국정원 개혁이 벌써부터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서 후보자는 국정원의 국내 정보수집 업무를 전면 폐지하겠다는 문 대통령 공약과 관련해 “국내 정보와 해외 정보가 물리적으로 구분되기 어렵다”고 밝혔다. 국정원의 수사기능을 폐지하겠다는 공약에는 “(국정원의) 대공 수사력이 약화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서 후보자 말대로 국내 정보와 해외 정보가 무 자르듯 구분되지 않고, 대공 방첩 수사에 국정원이 전문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이 국정원의 국내 정보수집 업무와 수사기능 폐지를 공약으로 제시하고, 시민들이 이를 지지한 이유는 국정원의 권한 남용을 차단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국정원 개혁 공약이 후퇴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국정원이 살고 대한민국이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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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특별검사팀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의 비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른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것은 기본이고,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 사업에서 특정 기관을 탈락시킨 정황까지 나왔다.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대선에 불법 개입한 혐의로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형사처벌까지 받았지만 국정원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 국정원, 시민 아닌 정권에 봉사하는 국정원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적이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국정원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일탈 행태 시정 필요’ 문건에는 지방자치단체 산하의 문화재단들이 좌편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감사 등을 거쳐 보조금을 삭감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작가회의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 정권에 비판적인 단체를 탈락시키기 위해 최종 심사까지 마친 ‘현장 예술인 교육 지원 사업’을 갑작스럽게 폐지하는 과정에도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사실이라면 국정원이 정보 수집 차원을 넘어 정부 부처의 예산 집행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매우 심각한 일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1월 10일 (출처: 경향신문DB)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목할 만한 작가상’ 선정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이사 선임 과정에도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폭로가 있다. 문화예술인 이름 뒤에 알파벳 K나 B가 적혀 있는 새로운 블랙리스트도 발견됐다. 지난해 초 작성된 이 블랙리스트에서 K는 국정원, B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선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특검은 문화체육관광부 압수수색을 통해 국정원과 문체부 직원들이 “진보성향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배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e메일을 주고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특검은 국정원의 불법과 일탈이 드러난 이상 좌고우면할 필요없다. 특검법은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인지한 사건을 수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특검은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 등 전면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정원은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되는 정보·보안 및 범죄수사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다. 막대한 인력과 예산 지원을 받고 있지만 국가안보를 명목으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정권에 악용될 우려가 있어 무엇보다 중립이 중요하지만 현재로서는 시민들이 감시하고 통제할 방법이 전무하다. 특검 수사가 국정원의 게이트 개입 의혹을 규명하고 관련자와 책임자를 처벌해 국정원 개혁과 인적 청산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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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관여한 정황이 드러났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따르면 국정원 정보관들이 문화체육관광부 직원들과 e메일 및 휴대전화를 이용해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개입한 단서가 포착됐다. e메일에는 “진보성향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배제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특검팀은 국정원 직원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문제와 관련해 국민연금의 내부 동향을 파악해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에게 보고한 단서도 확보했다. 정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연루되지 않은 적이 없는 국정원이 여전히 불법 정치 개입 구태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사례는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이명박 정권 이후만 해도 민간인 사찰 의혹과 대선 개입 여론조작,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등 국내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정작 정보기관 본연의 업무인 대북정보 수집에서는 허점을 드러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징후를 사전 포착하지 못하거나 멀쩡하게 살아 있는 북한 고위 인사가 사망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간첩조작 사건 등 인권 침해 행각도 잇따랐다. 국정원을 개혁하지 않으면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기 어려운 지경이다.

국정원은 일탈 행태가 드러날 때마다 개혁을 내세웠지만 시늉만 냈을 뿐이다. 민간인 사찰 때는 정치중립 선언문을 제출하고, 대선 개입 여론조작 사건 때는 이른바 ‘셀프 개혁’을 했지만 탈정치, 탈권력화라는 개혁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난해에는 테러방지법 제정으로 개혁 1순위 기관이 개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몸집만 불린 공룡이 되었다. 그렇다고 국정원 내부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준 적이 없다.

국정의 정상화를 위해 국정원 개혁은 필수적이다. 촛불의 힘이 작동하는 지금이 국정원을 실질적으로 뜯어고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특검이 철저한 수사를 통해 게이트 개입 행각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겠지만 이와 별개로 근본적인 개혁 작업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기존 제도를 인정하고 몇몇 통제장치를 만드는 정도로는 근본대책이 될 수 없다. 우선 정치 개입의 제도적 통로를 막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정원 정보관의 기관 출입 금지가 선행 조건이다. 또한 정보기관으로서 필요한 업무를 제외한 모든 업무에서 손을 떼도록 하고, 이에 맞춰 조직과 인력, 예산과 권한을 축소하는 대수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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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 경향신문 취재진과 만나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 당시 불거진 이른바 ‘논두렁 시계’ 진술은 국가정보원이 조작해 언론에 흘린 것이라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선물받은 명품시계를 “바깥에 버렸다더라”고 진술했지만 “논두렁에 버렸다”고 말한 것으로 바꿔 언론에 제공했다는 것이다. ‘논두렁 시계’ 보도는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에 큰 흠집을 냈고, 그를 막다른 길로 내몬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됐다.

국정원은 일단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보였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사 최고책임자의 고백이란 점에서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국정원이 검찰 수사 내용을 조작, 언론에 제공해 여론을 호도했다면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중대 범죄다. 검찰은 당장 의혹의 실체적 규명을 위한 수사에 착수하기 바란다. 국회도 진상 조사를 벌일 필요가 있다.

이 전 중수부장은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한 국정원의 당시 행태가 “공작 수준에 가까웠다”고도 했다. 국정원이 전직 대통령을 망신주기 위해 정치 공작 차원에서 검찰 수사 내용을 왜곡하고 여론을 조작했다는 얘기다. 직원 몇몇의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조직적 범죄 성격이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검찰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 직원이 수사팀을 찾아와 “‘시계 부분은 보도되도록 하자’고 제안해 거부했는데, 이후 ‘논두렁 시계’ 보도가 나왔다”고 전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2주년인 25일 서울 마포구 신촌역 부근 거리에 국정원의 대선개입 등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단이 떨어져 있다. (출처 : 경향DB)


당시 국정원의 최고책임자는 원세훈 전 원장이다. 원 전 원장은 이미 댓글달기를 통한 대선 여론 조작을 꾀한 혐의로 공직선거법상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번에는 이명박 정권 초기부터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해 여론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도대체 국정원의 탈선이 어디까지 진행된 건지 모를 일이다. ‘원세훈 국정원’은 현직 대통령의 대선은 물론 전직 대통령 수사에도 개입함으로써 또다시 정보기관의 정치중립 의무를 저버린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갖게 됐다. 원 전 원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다시 법정에 세워 노 전 대통령 수사의 진상과 정권 차원의 개입 여부를 철저히 가려야 한다.

국정원은 내부 감찰에 착수하겠다고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검찰 수사나 국회 조사와는 별개로 조직의 명운을 건 전면적 쇄신이 필요하다. 이 전 중수부장과 당시 검찰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당시 ‘노무현 수사’는 진행 상황이 연일 공개되면서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논란이 거세게 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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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증거조작 사건에 가담한 국가정보원 직원과 협조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은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겠다며 증거를 조작한 국정원 김모 과장과 이모 전 대공수사처장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다른 피고인 4명의 공소사실도 대부분 유죄로 판단했다. 국정원이 수집하고 검찰이 제출한 증거의 위조 사실을 법원에서 인정한 것으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다만 사건의 성격과 파장에 비해 양형 수위가 낮은 점은 유감스럽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국가의 형사사법기능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국정원의 임무 수행에 지장을 초래했으며, 재외공관 공문서 내용의 진실성에 관한 신용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형량은 예상보다 가벼웠다. 재판부는 증거조작을 주도한 김 과장에 대해 검찰 구형량보다 적은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불구속 기소된 이 전 처장에겐 징역 1년6월을 선고하고도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법정구속을 면해줬다. 이인철 전 주선양총영사관 영사에겐 공소사실 전부를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국정원과 검찰의 간첩 증거조작 사건 설명회'에서 당사자인 유우성씨와 장경욱 변호사가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_ 연합뉴스


증거조작은 재판부가 밝힌 대로 “국가의 형사사법기능을 심각하게 방해한” 국기문란 범죄다. 국정원장은 물론 대통령까지 대국민 사과를 할 만큼 파장도 컸다. 양형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물론 이것이 법원만의 책임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검찰의 부실수사에서 비롯한 측면이 크다. 검찰이 기소 당시 ‘특별법 우선 원칙’을 무시하고 국가보안법상 날조죄 대신 형량이 훨씬 가벼운 형법상 모해증거위조죄 등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비교적 가벼운 양형에 안도할지 모르나, 그렇다면 오산이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형사사건의 증거를 조작했다는 것은 씻기 어려운 굴욕이다. 국정원은 더 이상 대공수사권을 유지할 명분이 없다. 이제는 대공수사권을 검경으로 이관해야 한다. 검찰의 공안수사도 획기적 전환이 필요하다. 최근 북한 보위사령부 직파간첩 사건에서도 무죄가 선고되며 위법적 공안수사 관행이 거듭 확인된 바 있다. 검찰은 그럼에도 자성하기는커녕 ‘공안사건 전담 재판부’ 신설을 법원에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잇단 무죄 판결은 잘못된 수사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인데, 오히려 법원의 전문성을 탓하는 형국이니 어처구니가 없다. 간첩 사건을 포함해 어떠한 사건에서도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수사는 용납될 수 없음을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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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한 언설을 늘어놓는 일은 언론의 역할이 아니다. 하지만 상식이 외면받는 시대엔 어쩔 수 없다. 진부한 당위라도 재론해야 한다. 기소권을 독점하는 검찰이 1심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면 항소하는 게 상식이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검찰이 상식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모양이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에 대해 항소 여부를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반면 환호작약해도 모자랄 원 전 원장은 “국정원법 위반 혐의도 무죄를 받겠다”며 일찌감치 항소장을 제출했다. 누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고, 어디가 범죄를 처벌하는 곳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취재진을 피해 법정을 나서다 기자들에 둘러싸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지난 11일 ‘원세훈 대선개입 무죄’ 판결이 내려진 후 검찰은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판결문을 분석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원칙론이 전부였다. 앞서 검찰은 추석 연휴 전날 ‘직파간첩 사건’ 홍모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즉각 항소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심지어 증거조작으로 무죄가 선고된 유우성씨 사건도 대법원에 상고했다. 원 전 원장 사건을 둘러싼 검찰의 침묵은 극히 이례적이다. ‘청와대 눈치보기’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원 전 원장의 대선개입 인정 여부가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과 직결되는 만큼 수뇌부가 부담스러워하는 듯하다. 원 전 원장을 법정에 세운 ‘채동욱 검찰’이 찍혀나간 뒤 ‘김진태 검찰’이 공소유지에 별 관심 없었던 걸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 상식까지 배반해선 안된다. 검찰의 기소권은 주권자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다. 자의로 공소를 제기할 권리가 없듯이 자의로 공소유지를 포기할 권리도 없다.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 자기부정이자 직무유기가 된다. 정권을 대놓고 비호한다는 비판도 면할 수 없다. 검찰은 항소해야 마땅하다. 다만 여론에 밀려 ‘무늬만 항소’하는 식이 돼선 곤란하다.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반드시 유죄를 받아내겠다는 의지와 복안이 뒷받침돼야 한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행위가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할 여지가 있음은 별론으로 한다”고 밝혔다. 검찰이 적용한 선거법 85조(공무원의 선거관여 금지)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86조(공무원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 위반 가능성은 남겨둔 것이다. 검찰은 86조까지 추가로 적용해 항소해야 한다. 검사는 특정 정권의 수족이 아니라 ‘공익의 대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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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시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역사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 제1조는 규정하고 있지만, 건국 이후 오랜 기간 이 규정은 독재자들의 칼날 앞에 무력했다.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그 칼자루를 들고 설친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정보기관이었다. 중앙정보부를 필두로 이름만 바꾸어온 이 정보기관은 선거 때마다 정치공작을 감행함으로써 주권자인 국민을 모독했다. 민주화의 성과로 이런 범죄행위는 사라진 듯했으나 2012년 국정원은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의 기술 수준에 맞는 역사적 사건을 일으켰다.

지난주 목요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국정원 댓글사건의 판결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기소한 여러 범죄사실을 증거불충분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204쪽이나 되는 방대한 판결문 곳곳에 국정원이 현실정치에 개입하여 국민의 여론 형성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재판부는 대통령 선거 시기 국정원 직원들이 정부의 정책이나 국정 성과 등을 홍보하는 댓글과 대선 후보자와 소속 정당에 대한 반대·비방 취지의 글을 상당수 작성하여 사이버 공간에 게시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원세훈 전 원장을 비롯한 피고인들에게 국정원법 위반으로 유죄를 인정했을 뿐 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결과적으로 정권의 정통성에는 일조하였지만 사법정의의 외피를 쓴 정치판결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선거 시기에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인정하였다면 공직선거법상 금지되어 있는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한 선거개입이라고 보는 것이 법률가의 경험칙과 국민 일반의 법 상식에 부합한다. 선거 국면에서 국정원이 여당에 유리하고, 야당에 불리한 정치댓글 작업을 조직적으로 한 것이 밝혀졌다면, 그것을 여당 후보자를 위한 비밀 선거운동 외에,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백보를 양보하여 국정원법에 의한 정치개입만 유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피고인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전형적인 솜방망이 처벌이다. “국가기관이 특정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국민들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행위는 어떠한 명분을 들더라도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아니된다.” “이 사건 범행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그 죄책이 무겁다.” 이렇게 말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재판부 자신이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피고인들 전원이 법정 밖으로 유유히 걸어나가도록 했다. 국기문란의 주범이라 훈계하면서, 한편으론 이런저런 이유를 들먹이며, 선처에 선처를 한 것을 어느 누가 사법정의라 운운할 수 있을까.

취재진에 둘러쌓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 (출처 : 경향DB)


더 묵과하기 힘든 것은 재판부가 피고인들에게 공직선거법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또 다른 공직선거법 위반 가능성을 버젓이 거론했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이 공무원의 ‘선거개입 행위’와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구별하여 규정했음에도, 검찰은 오로지 선거개입 행위만 기소했다. 재판부는 전자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하였지만, 후자의 경우는 공직선거법 위반을 인정할 여지가 있다고 하였다. 검찰은 주위적으로 주장하는 공소사실이 무죄가 될 경우를 대비하여 유죄가 될 수 있는 다른 법조 적용을 예비적으로 청구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공판이 종결될 때까지 그런 조치는 없었다. 검찰의 공소유지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런 경우 재판부는 검찰로 하여금 적용 법조를 바꾸도록 요구할 수 있음에도 판결문에서 검찰에 훈수하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믿고 싶지 않지만 민주주의 유린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단죄 의지는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일 이 판결이 그대로 확정된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조종을 울렸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항소심에서 이를 바로잡지 않을 경우 주권재민을 선언한 우리 헌법은 또다시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박찬운 |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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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 심리전단에 대선개입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정원법 위반 혐의는 유죄로 인정됐으나 집행유예형을 받아 재수감을 면했다. ‘대선 기간 중 정치에는 관여했지만 선거에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술 마시고 핸들을 잡기는 했으나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논리인가. 상식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납득이 가지 않는 판결이다. 원 전 원장은 처벌하되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 논란은 막으려다 나온 ‘정치적 판결’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는 국정원의 댓글·트위터 활동이 “정치인으로서의 대통령 및 여당을 지지하고, 야당 및 정치인들을 반대·비판했다”며 국정원법이 금지한 정치관여 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법원은 그러나 이 같은 행위에 목적성·능동성·계획성이 부족한 만큼, 선거법에서 규정한 선거운동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정치관여를 넘어 선거개입이 되려면 보다 치밀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취지다.

국정원 대선개입 무죄판결을 규탄하기 위해 청계천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 (출처 : 경향DB)


문제는 법원이 든 근거다. 재판부는 “선거운동은 특정 후보의 당선이나 낙선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검사가 선거운동의 시작점으로 기소한 2012년 1월은 18대 대선후보의 윤곽조차 불명확한 상황이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로 확정되지 않았을 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의 혁신작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새누리당 후보가 누가 될지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었는데, 재판부만 윤곽조차 몰랐단 말인가. 이러니 ‘짜맞추기’ 판결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범죄를 총지휘한 사령탑이 집행유예를 받고 유유히 귀가했다. 이 장면은 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 국가기관과 공직자들에게 좋지 않은 신호를 줄 것이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여론조작에 나선다 해도 선거법 따위는 ‘무사통과’할 수 있다는 신호 말이다.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엄벌해야 할 사법부가 외려 이를 감싸고 관권선거를 사실상 합리화하는 결론을 내린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상급심에서는 보다 엄정한 심리를 통해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 판결이 내려지기 바란다.

청와대와 새누리당도 기뻐할 때는 아니다. 원 전 원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받았다고 하나, 국정원이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및 여당을 지지”하는 행위를 한 것은 사실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깊이 반성하고 자중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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