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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27 정조의 책가도에 깃든 사연

주말이면 무슨 의식을 치르듯 동네 서점에 간다. 이미 책은 넘칠 만큼 많지만 기어이 몇 권을 사 온다. 온라인상으로도 부지런히 책을 주문한다. 이제 학교연구실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책과 문구, 골동과 그림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곳에 파묻혀 지내는 순간을 즐긴다. 읽었던 책들,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수북이 쌓여 나를 감싸고 있는 공간이 더없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수업과 잡문 쓰는 일과 학교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정작 책 읽은 시간이 많지 않은 게 시름이라면 시름이다. 그렇다 해도 사방 벽면을 책이 막아서고 있는 이 공간에 있노라면 턱없는 위안이 된다.

정조가 바쁜 정사로 인해 책을 가까이 하지 못해 책가도를 병풍으로 둘러쳤다던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정조는 학문을 통하여 세상을 이끌어가려는 큰 비전을 가진 탁월한 정치가였으며, 동시에 가히 당대 최고의 학자였고, 저술가이자 출판가였다. 나는 이런 군주가, 지도자가 너무 부럽다.

한편 학문적 자부심이 대단한 군주였던 정조는 유능한 젊은 학자들을 선발해 스스로 군사로서 그들을 교육하고 함께 학문에 정진하고자 규장각을 설치했다. 규장각은 본래 정조 즉위 직후 역대 군왕이 지은 글과 글씨를 봉안하기 위해 설립되었지만 이후 그 기능이 확대되어 실록의 초고를 집필하거나 과거 시험을 담당하는가 하면 국왕과 신하들이 학문과 국정을 논하는 경연도 이루어졌다. 천성적으로 학문하기를 즐겼던 정조는 바쁜 정무로 인해 독서할 시간이 부족하자 책가도로 대신했다고 전한다.


“예전에 정자가 이르길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책 있는 방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정조) 책가도는 책장에 있는 여러 완상물이 장식되어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전해 내려오지는 않지만 정조가 애용했던 책가도는 분명 책만 가득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책을 좋아한 호학 군주였던 정조는 이 책거리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화원에게 책가도를 맡겼다. 책가도의 책장 속에 놓인 책들은 모두 성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유교 경전으로 채워졌다. 그것은 정조가 읽었던 책들이자 자신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책들이기도 했다. 체제 수호를 위해서 주자학을 계승하면서도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새로운 문물을 도입한 유교적 계몽절대군주였던 정조는 재정, 군사 분야의 실용 지식을 중시했고 경학에도 정통했지만 여전히 성리학적 세계관을 우선시한 군주다. 그러한 입장을 보여주는 책들이 정조의 책가도를 채운 책들이다.

책가도는 정조의 관심에 힘입어 이후 크게 유행했다. 이처럼 정조시대 궁중에서 제작된 책거리 그림은 다분히 정치적 목적을 겸해 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민간에 전해지면서 그 자리를 서민 사회의 세속적인 욕망이 채웠다. 서민의 입장에서는 유교 경전에 깃든 성인의 말씀보다는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이끄는 세속적 이익이 더 우선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민간에 내려온 책가도 속의 물건들은 책을 포함해 현실적 욕망을 대변하는 것들, 세속적 행복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등장한다.

정조가 애용한 책가도를 떠올리다가 문득 우리 모두의 책장이 궁금해졌다. 우리는 어떤 책들을 수집하고 읽고 가슴에 새겨둘까? 우스갯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책 한 권 읽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읽은 책 한 권으로 인해 받아들인 것을 절대적인 지식으로 삼아 살아갈 것이다. 그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다.

독서란 나와 다른 이의 감각과 사유를 만나는 일이자 편협한 나로부터 부단히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돌이켜보면 우리네 삶이 이처럼 이기적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로 치닫는 이유의 하나가 독서의 부재 때문은 아닐지 모르겠다.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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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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