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청산은 사회 규범 확립의 요소다. 공동체의 건강한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이기도 하다. ‘흑역사’의 진실 규명과 피해자 구제, 가해자 문책은 그래서 시대적 과제가 된다. 한국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두 갈래다. 일제강점기의 매국 및 협력 행위와, 한국전쟁 및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인권 유린 문제다. 모두 70년도 지나지 않은 가까운 과거사이고 살아있는 이해당사자도 많다. 충격과 진통이 작을 수 없다. 하지만 새살이 돋아나려면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

과거 청산 작업에서 사법부의 역할은 중요하다. 전 과정에 사법적 판단이 필요하다. 사법부의 올바른 역사인식이 엄중한 이유다. 그러나 최근 국가의 폭력과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한 시대착오적 판결을 보면 걱정된다. ‘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지만 대통령이 이를 발동한 것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므로 불법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이 본보기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 20일간 불법구금돼 조사받은 최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판에서 “최씨에게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한 원심을 깬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판결이다. 긴급조치는 영구집권을 노린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 저항을 탄압하는 정치도구로, 위헌 선고를 받은 지 오래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시대에 이 조치로 부당하게 피해를 당한 사람이 어떤 국가 배상도 받을 수 없다면 사법부와 행정부는 존재 이유의 정당성을 갖추기 어렵다. 12·12 쿠데타 주모자 재판 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던 검찰 주장을 연상시킨다.

이런 식이라면 독재자가 위헌 법률을 만들고 그 법에 따라 국민들을 탄압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대법원은 종종 하급심과 다른 판결을 한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라 하더라도 기본권 보장을 구현해야 할 법원의 책무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2010년 대법원 판결과 배치된다. 대통령의 ‘고도의 정치적 행위’와 국민 기본권 중 어느 것이 더 보호해야 할 민주적 가치인지 모른단 말인가. 더욱이 대법원은 헌법의 기본 가치와 정의에 어긋나는 판결을 한 과오에 대해 여러 차례 공식 사과한 바 있다. 자기 부정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조작된 ‘문인간첩단’의 소설가와 평론가들을 감옥에 가뒀다. 왼쪽부터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장병희씨(필명 장백일)가 재판정에 나와 있다. (출처 : 경향DB)


사법부 내에서는 법실증주의를 들어 이번 판결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정당한 도덕규범의 기준은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실정법대로 판결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귀에 익숙한 논리다. 사법부의 과거에 대한 청산 요구가 분출되자 항변하며 이 논리를 내놨다. 그렇다면 일제 부역자나 나치 전범도 처벌할 수 없을 터이다. 국민 기본권 유린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도 높다. ‘화석’이 된 법실증주의를 도피처로 삼는 대법원이 인권 보장의 보루를 자처할 수는 없다.

사법부의 이런 행태는 박근혜 정권의 탄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태생적 보수인 사법부가 과거사에 대한 사과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박 정권 출범 후 기다렸다는 듯이 본색을 드러냈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다.

박근혜 정부는 국정 운영에 특정 과거사를 자주 불러낸다. 대통령이 앞장서고, 눈치 빠른 여당과 정부 부처가 따라 한다. 과거를 통해 국정 운영의 통찰력을 추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 성찰과 교훈을 준다. 예컨대 IMF 외환위기는 국가경제 투명성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논란은 과거의 ‘문제적’ 제도나 인물, 관행을 소환해 반면교사로 삼지 않고 ‘모범사례’로 둔갑시키는 데서 발생한다. 박 대통령은 몇달 전 영화 <국제시장>의 태극기 하강식과 애국심 발언으로 반발을 샀다.

국민 다수가 ‘집단적 악몽’으로 생각하는 유신시대에 대한 박 대통령과 사법부의 심정은 비슷할 것 같다. 독재권력에 편승·침묵한 사법부나 당시의 통치를 동경하는 대통령이 연대의식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과 박 대통령이 과거사를 과오에 대한 면죄부나 비판에 대한 원천봉쇄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그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유신시대를 비판함으로써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통령 후보 자격을 얻었다. 사법부가 오늘날 시대착오적 법실증주의 주장까지 할 수 있게 한 자유와 민주주의는, 긴급조치 탓에 고통을 겪었지만 자신들이 법적 구제를 거부한 사람들의 희생의 산물이다.

사법부가 권력에 고개를 숙이거나 양심과 민주적 가치를 외면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어두운 과거사가 증명한다. 과거사 재판에서 법과 정의와 양심으로 판결하되 자기 성찰을 잊지 말기 바란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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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지만 그것을 발동한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는 사법부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민사3부는 그제 긴급조치 9호 위반을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20일간 불법구금돼 조사를 받은 최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최씨에게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대전지법에 돌려보냈다. 긴급조치 9호가 사후적으로 법원에서 위헌·무효로 선언됐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국민 개개인에 대해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판결이다. “위헌이지만 불법은 아니다”라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을뿐더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며 그런 주장을 펴고 있지만 그것이 쿠데타나 철권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헌법에 위반되는 행위로 개인에게 피해를 입히고도 배상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사건을 맡은 비상고등군법회의 모습. 오른쪽 변호인석에 서있는 옆 모습의 인물이 한승헌 변호사(1974년 7월). (출처 : 경향DB)


이번 판결은 그동안 사법부가 내린 판결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기도 하다.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 이른바 통치행위라 하여 사법심사를 스스로 억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기본권 보장,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해야 할 법원의 책무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2010년 판결 취지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법부는 긴급조치 1·4·9호에 대해 현행 헌법과 유신헌법에 모두 위반되어 애초부터 위헌·무효라고 판시하고 관련 사건 재심을 통해 잘못된 과거 판결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과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제 와서 다시 ‘고도의 정치적 행위’ 운운하며 긴급조치 발동행위에 면죄부를 준 것은 심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대법원은 긴급조치 피해자 국가배상 청구소송에서 퇴행적 판결을 잇달아 내리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도 긴급조치가 위헌이지만 당시에는 유효한 법규였던 만큼 이를 집행한 공무원의 직무행위는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논리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판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행위의 불법성마저 부정한 셈이다. 과거사에 대해 대법원이 역주행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올해는 긴급조치 발동 40년을 맞는 해다. 일제강점기 못지않게 우리가 기억하고 성찰해야 할 역사가 거기에 있다. 일본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도 끊임없이 기도되는 과거사 부정의 망령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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