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만 한 화면에 코를 박은 채 히죽거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정신을 문득 차려보니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를 흘끔거리며 쳐다본다. 민망함을 수습해볼 요량으로 쓸데없는 말을 건넸다. “<더 케이투>(배우 지창욱이 최근 출연한 드라마) 보세요?” 말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반색하며 손을 모아 쥐었다. “대~박이죠. <힐러>도 보셨어요?” 안 그래도 지창욱에 ‘꽂혀’ 그의 전작을 밤마다 몰아 보고 있던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몇십분 전만 해도 “약속은 하고 오신 거냐”며 심드렁하게 묻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곰살맞게 변해 있었다. 심지어 서랍을 열고는 초코바까지 내놓았다. 취재원의 사무실에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애매하고 어색하던 상황은 순식간에 십년지기의 만남처럼 화기애애해졌다.

드라마 하나로 생면부지의 남들과 대동단결했던 경험은 꽤 여러 번 있다. 올 초 <태양의 후예>가 방송됐을 때도 그랬다. 찜질방 TV 앞에 제각기 눕거나 퍼질러 앉았던, 일면식도 없던 ‘우리들’은 유시진이라는 이름 아래 맥반석 달걀을 나눠 먹으며 든든한 유대감을 다졌다.

‘할 일 없고 한심한 아줌마들이나 즐기는 하위 문화’라며 드라마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판단이야 자유지만 드라마의 미덕을 폄훼하진 말자. 당대의 욕망과 무의식을 반영하는 드라마를 통해 우린 시대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드라마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기도 한다. 대사 한마디가 영혼을 뒤흔들어 놓으며 인생의 큰 가르침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이 때문에 유명 인사나 스타가 나와 같은 드라마를 즐긴다면 괜히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히잡을 쓰고 만면에 웃음 띤 얼굴로 누군가에게 “<태양의 후예>도 보셨느냐”고 묻던 박근혜 대통령의 그 벅찬 심정. 안다. 나도 무수히 느껴봤으니까.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17일 (출처: 경향신문DB)

드라마에 빠지고 즐기는 것은 보편적인 정서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한하다. 드라마를 그렇게 사랑하는 대통령이라면 공감능력이 정상 수준은 될 법한데 공감은 고사하고 일상적 의사소통도 안된다. 100만명 넘는 국민이 매주 청와대 코앞에서 대놓고 외치는 소리가 ‘외계어’(알아듣기 어려운 신조어)로 들리는 게 분명하다. ‘길라임’이고 싶었으나 실상은 ‘별에서 온 그대’인 건가. 국민들의 말이 ‘외계어’로 들린다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드라마 주인공들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보시라.

먼저 유시진 대위다. “그럼 하나만 물어봅시다. 혹시 이게 마지막일지 몰라서…. 뭘 할래요? 당장? 하야할래요? 고백할래요?” 매주 광화문광장에 나서는 ‘오해영’도 외친다. “대통령이 꼼수 부리니 좋은 거 하나 있네. 광화문에 계속 나오고 싶어진다는 거. 일찍 일찍 좀 하야해라. 사과는 바라지도 않는다. 나 뚜껑 열린다. 진짜.” 함께 나온 길라임의 남자 ‘김주원’도 경고한다. “내가 이 밤중에 여기 왜 이러고 있겠냐. 알고 싶어 온 거잖아. 그러니까 네 말만 하지 말고 대답 좀 해라. 7시간 동안 뭘 했는지. 경고하는데 다시는 딴 놈 핑계 대며 피해자 코스프레 하지 마. 내려놓는 척하며 말장난도 하지 말고. 두 번 다시 그런 담화문 갖고 나 찾아오지 마.”

형편없는 새누리당을 향한 천송이의 일침이다. “이번에 나라꼴이 바닥을 치면서 기분 참 더러웠는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어. 사람이 딱 걸러져. 진짜 국민 편과 국민 편을 가장한 ‘척’.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라는 하느님이 주신 큰 기회가 아닌가 싶다.”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즐겨 봤다는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 ‘강마에’도 엄청 화가 났다.

“당신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뭐라 그러는 줄 알아요? 구제불능, 민폐, 걸림돌. 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렇게 불러주고 싶어요. 똥! 덩. 어. 리.”

문화부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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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정치를 ‘대중문화’로 만들어버린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것에 제일 능했던 이는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배우 출신의 레이건은 자신이 주인공인 영웅담을 대중에게 선전하는 것이 실제 무슨 일이 있었냐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설, 협상, 그리고 정책에 있어서도 할리우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을 시청하느라 정상회담용 자료를 검토하지 못했던 일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할 테면 해봐. 오늘은 나의 날이야”라는 대사에 감동을 받아 의회의 조세 인상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심지어 ‘미국의 위대함’을 설파하기 위해 인용하곤 했던 일화는 <날개와 기도>(1944)의 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자신이 연기했던 배역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대중에게 어필했고, 이후 할리우드 백인 남성 영웅을 지도자로서의 자기 이미지이자 레이건 행정부의 이미지로 전유했다. 영화학자 수잔 제퍼드는 <하드바디>에서 이를 자세히 분석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17일 (출처: 경향신문DB)

신자유주의의 시작을 알렸던 레이건 이후 36년. 신자유주의가 이제 그 생명을 다해가고 있는 시점에 대중문화가 길러낸 두 번째 미국 대통령이 등장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다. 2000년대 초반. 연이은 부도로 위기에 당면한 부동산 재벌 트럼프는 독특한 생존전략을 선택한다. 스스로를 이미지 상품으로 만들어 ‘트럼프 브랜드’의 가격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출연한 것이 <어프렌티스>라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였다. ‘견습생’이라는 뜻의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은 트럼프 눈에 들어 살아남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어프렌티스>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그의 재산도 늘어갔다. 그리고 그의 성공 신화는 미국의 성공 신화로 다시 쓰여졌다. 이 신화에서 인간 군상은 영웅이 되기 위해 비열한 협잡꾼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어떤 모욕도 견뎌낸다. 그것이 ‘생존’의 의미인 것이다. <어프렌티스>를 경유해 자본의 독재와 신민의 무한경쟁은 오락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10여년 후. 그는 미국 대선이라는 새로운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의 주인공으로 대중 앞에 선다. 레이건이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영웅을 자기 이미지로 참고했다면, 트럼프는 미국 대중문화의 가장 저열한 면모인 리얼리티 쇼의 천박한 자본가 이미지를 자원으로 삼았다. 대선 과정에서 전시했던 그의 독설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어프렌티스>의 유행어 “너, 해고야(You’re fired)”와 다르지 않다.

그저 가십일지도 모르는 이런 이야기의 끝에 ‘길라임’을 떠올리게 된다. 드라마 광팬으로 알려진 박근혜 대통령은 일국의 지도자로서 어떤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큰 영애(令愛)’의 이야기는 모든 국민이 알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런 ‘국민 드라마’ 혹은 ‘우파의 신화’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대통령 후보 박근혜를 믿고 따랐던 유권자들에게는 ‘장사꾼 이명박’과는 다른 ‘진성 정치인으로서의 우아함과 리더십’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고, 그 판타지는 아버지 박정희가 영애에게 남겨준 위대한 유산이었다. “우리 근혜 불쌍해”와 “우리 근혜는 달라”라는 익숙한 말을 떠올려 보라. 박근혜 스토리의 셀링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그가 <태양의 후예>의 열렬한 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연히 그의 자기 이미지가 ‘유시진’일 것이라 생각했다. 군국주의의 화신이자 비열한 공무원들과는 질이 다른 고귀한 ‘귀족’으로서, 유시진은 우리를 구원할 아버지의 재림이었다. 그리고 그 영웅적 재림의 실현이 박근혜의 자기 이미지이리라 상상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보기 좋게 어긋났다. 박근혜 게이트의 ‘막장 드라마’로 추론해보자면, 그는 ‘길라임’ 혹은 ‘강모연’으로 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트럼프보다도 한심스럽다. 지도자로서 아무런 자기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길라임과 강모연은 치열한 자기계발로 얻은 재능과 커리어와 ‘미모’를 전부 다 이성애 연애의 완성을 위한 자원으로 소진하는 신자유주의형 공주다. 그리고 이런 공주 이야기의 핵심은 백마 탄 구원자에 대한 판타지다.

업무를 시작하고, 홈페이지를 개편하는 등 청와대의 적극적인 대응이 시작됐다. 성실하게 수사를 받겠다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태도다. 옆에서 구원자들이 머리를 굴리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들까지 발본색원해서 그의 판타지를 철저하게 깨는 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다. 더 이상 그에게 해피엔딩을 허할 수 없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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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야당과 재야단체의 직선제 개헌 요구가 높아지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겠다”는 4·13호헌 조치를 발표한다. 그러나 서울대학생 박종철 열사가 정부 발표와 달리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6월항쟁이 본격화된다. 6월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렸고, 26일에는 100여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여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는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며 6·29선언을 했다. 야당도 합의하면서 개헌이 이뤄졌지만 그해 12월16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다. 그는 1979년 12·12쿠데타의 주역 중 한명이었다.

당시 상황은 다시 광장과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얘기해 준다. 우선 헌법까지 바꿨지만 직선제라는 협소한 정치체제의 변화만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만들어진 야당의 한계는 당시나 지금이나 반복되고 있음도 새삼 깨닫게 된다.

강원도 원주시 중·고등학생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2016년 11월을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100만개의 촛불이 모이자 시민혁명이 시작됐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동시에 가야 할 길은 멀고 지난할 수도 있다는 의구심도 싹트고 있다. 가장 큰 장벽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나는 버틸 테니 할 테면 해보라’는 식이다. 퇴진운동으로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지만 오락가락하는 야당의 태도도 벽이다. 소위 대선주자들의 이해타산과 백가쟁명식 주장만 난무하고 있다. 광장의 촛불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촛불은 이제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첫번째는 우리가 왜 촛불을 들었는지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샤머니즘’에서 ‘길라임’에 이를 정도로 소설·영화보다 더 픽션 같은 일들이 터지면서 광장의 촛불을 점화시켰다. 그러나 촛불은 이미 타오르고 있었다.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헬조선’으로 내몰린 시민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속에 촛불을 한자루씩 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광장에 모여 왜 촛불을 들게 됐는지를 얘기하고 어떤 세상을 함께 만들지에 대해 의견을 모아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야만 촛불의 힘은 기존 정치권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다행히 오는 19일부터는 전국적으로 촛불광장에서 토론이 이뤄질 예정이라고 하니 바람직한 일이다.

두번째는 ‘시민불복종’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유는 단 하나다. 대통령이 끝까지 버텨보겠다는 상황에서 광장의 촛불이 선택할 수 있는 유력한 카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민불복종은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849년 발표한 논문 ‘시민불복종의 의무’에서 도입됐다. 그는 논문을 통해 흑인 노예제를 지원하는 미국 정부에 대항한 납세거부를 지지했다. 그는 “우리는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이어야 한다. 옮음보다 법을 더 존중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시민불복종은 이후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한국에서는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정통성을 상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정부에 대해 시민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시민불복종밖에 없다. 촛불은 시민불복종의 시작일 뿐이다. 대통령의 버티기가 계속된다면 시민은 광장에서 뜻을 모아 모든 형태의 시민불복종을 조직할 수밖에 없다. 공무원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들의 업무가 특정 집단의 이권에 이용된 것이 분명해진 이상 정상적 업무수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은 2016년 11월을 향해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대해 토론할 것’과 ‘시민불복종을 조직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대광 전국사회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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