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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04 상상력, 체포 투옥 살해되다

‘그 사람은 너무 현실적이야’라는 말은 욕이었다. 낭만도 꿈도 이상도 없는, 당장 실현가능한 게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거나 매사를 이해득실로만 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그 말은 ‘그 사람은 한심한 속물이야’와 같았다. 이젠 ‘그 사람은 너무 현실적이야’라는 말은 욕이 아니다. 욕이다 아니다 이전에 그 말 자체가 사라졌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너무 현실적인’ 삶의 태도는 이제 한심한 것도 속물적인 것도 아닌 일반적인, 아니 필수적인 삶의 태도일 뿐이다.

흔히 사람은 현실과 이상 사이를 줄다리기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몸은 현실에 얽매여 있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하며 살아가는 게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라는 말엔 존경이 들어 있다.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나 ‘비현실적인 원칙주의자’라는 말엔 나는 저렇게 못 살지만 저런 사람이 있으니 세상은 희망이 있구나, 라는 뜻이 들어 있다. 오늘 한국에서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욕이다.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나 ‘비현실적인 원칙주의자’라는 말엔 명백한 경계와 혐오가 담겨 있다. 한국은 좀처럼 변화하기 어려운 사회로 접어든 셈이다. 현실은 오로지 ‘비현실적 상상’을 통해서만 변화하기 때문이다.

극우독재는 비현실적 상상을 철저히 억압했다. 감시하고 검열하고 금지하고 탄압했다. 비현실적 상상이 조직되고 행동이 될라치면 체포하고 투옥하고 살해했다. 그런 살벌한 시절이었음에도 ‘그 사람은 너무 현실적이야’가 욕이었던 것이다.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침묵으로 존중받았으며 바로 그래서 극우독재는 극복될 수 있었다.

오늘날 자본독재, 즉 신자유주의는 비현실적 상상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아예 거세한다.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하의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의 기업이 되어 끝없이 자기 계발과 경쟁으로 스러질 때까지 달려가며, 과잉 의욕과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에 포박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한국은 그런 경향이 다른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한 편이다.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는 싸움이 너무나 길고 고되었기 때문에 민주화만 되면 어떻게든 좋은 사회로 나아갈 거라는 낭만적 정서가 있었다. 정치적 자유와 함께 밀려들어올 시장 자유에 대한 경계의식이 없다시피 했고 결국 ‘국가부도’라는 쇼크와 함께 어떤 견제나 면역력도 없이 유례 없는 속도로 신자유주의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극우독재 세력이 아니라 민주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독재와 반독재, 보수와 진보 혹은 정치적 선과 악 같은 일반적 가치와 정서들이 뒤엉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가장 충직한 신자유주의적 신민으로 개조되었다.


▲ “‘자경단식 상상력 제거 작업’ 결과
정치는 현실적인 것에 제한된다
아름다운 상상에 뒤덮인 현실
진보 소임은 비현실적 상상이다”


비현실적 상상력이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거세된 건 물론이다. 이제 한국인들은 상상하길 두려워하는 걸 넘어 상상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여전히 상상하는 사람은 ‘비현실적’이라는 혐오와 경멸의 낙인이 찍힌다. 상상을 조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인신이 체포·투옥·살해되진 않지만 상상력은 철저하게 체포·투옥·살해된다. 그런 ‘자경단식 상상력 제거 작업’과 정서 속에서 진보는 ‘상상하지 않는 진보’로 재조정된다. 비현실적 상상을 좀 더 섬세하게 제거하기 위한 ‘아름답고 희망적인’ 상상 간판들이 세워진다. ‘현실적 상상’은 실은 상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덮인 채 유일하게 온당한 상상으로 상찬된다.

정치는 그 상한선이 현실적인 것으로 엄격히 제한된다. 자본주의 극복이나 반(反) 신자유주의 투쟁과 대안 모색, 계급적 의제 같은 진보정치의 골간들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배척된다. 진보 정치의 소임은 비현실적인 것, 즉 ‘다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 즉 ‘최악을 막는 것’이 된다. 결국 ‘차악’이 최선의 정치가 된다. 물론 최악과 차악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버림으로써 진보정치는 존재 이유를 잃고 사회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공전하게 된다.

선거 부정과 세월호 학살 등 온갖 패악질을 저지른 최악의 세력은 심판은커녕 7·30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둔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세월호특별법 제정’이 막막해지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다.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시민들’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차악이 최악의 2중대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차악이 그런 노릇을 지속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차악을 욕하면서도 차악 이상은 절대 상상하지 않는 자신들 덕이라는 사실은 생략된다.

최악과 차악은 언제나 최악과 차악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결국 그것들이 견제되고 극복되며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가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시민들’이 비현실적 상상력을 회복하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들에게 책임을 묻거나 비난하는 건 부당하다. 그들의 상상력이 거세된 건 그들의 선택이 아닌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사회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회복은 오로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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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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