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이 다시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앞으로 다가올 평화로운 한반도를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남북한이 협력한다면 우리는 멋진 한반도를 만들 수 있다. 비록 면적은 작지만 한반도에는 우수한 가치를 지닌 지질유산 지역이 많다. 제주도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고 놀라울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은 세계적으로 최고 중의 최고임을 인정받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그랜드캐니언과 나이아가라폭포, 중국의 황산과 장가계 같은 지역이 세계자연유산이라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 내에는 세계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지역이 여러 곳 있다. 2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같이 방문한 백두산, 남한에서 가장 멋진 산악환경을 보여주는 설악산, 그리고 서해안과 남해안의 수많은 섬들 사이에 분포하는 여러 갯벌 지역들이 그렇다.

평양정상회담 사흘째인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남측 공식수행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백두산은 서기 946년에 화산폭발이 일어났으며,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이다. 지난 1000년 내에 폭발한 화산 중에서 가장 강력한 폭발력을 가졌던 화산으로서 전 세계 지질학자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남북한, 그리고 중국 학자들과 함께 백두산을 연구할 수만 있다면, 가까운 장래에 백두산이 지니는 탁월한 가치를 입증할 수 있다. 또한 DMZ 근처에는 북한 평강지역에서 분출되어 한탄강을 따라 110㎞ 이상을 흘러내린 용암지대가 분포한다. 한탄강을 따라 흘러내린 화산지형에 대한 연구를 남북한 학자가 공동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이 지역을 백두산과 함께 세계자연유산으로 추진하는 것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설악산은 전 세계에서 아주 드문 지질·지형학적인 가치를 가지며, 세계자연유산으로 추진할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비슷한 지질학적 특징을 보이는 지역이 북한의 금강산이다. 만일 금강산의 가치를 추가로 발굴할 수 있다면, 남북한 정부는 공동으로 이 두 지역을 세계자연유산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이 설악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잠정목록으로 포함시킨 것처럼, 북한도 금강산을 잠정목록에 이미 포함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 대한 공동추진 전망은 아주 밝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의 해양환경도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특별나다. 높은 조차로 인해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섬들 사이를 하루에 두번씩 방향을 바꾸어가며 빠르게 흐르는 조류는 과거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승을 이루게 한 특별한 바다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섬들 사이에 수천년 동안 두껍고 넓게 쌓인 갯벌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 문화재청은 이 갯벌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서천, 고창, 신안, 순천-보성 갯벌이 강력한 후보지이다. 올해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제주도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지역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해외 전문가들은 강화군과 옹진군에 넓게 분포하는 갯벌을 포함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 넓은 지역은 DMZ를 포함하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추진 중인 지역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만든 후에 DMZ를 포함한 지역을 추가로 신청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갯벌은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의 중요한 사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땅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이 땅이 지닌 뛰어난 가치를 잘 모르고 지내왔다. 올해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진 만큼, 이제는 우리가 서로 협력하여 앞으로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최북단의 백두산에서 최남단의 제주도까지 한반도 내 여러 지역을 남북한이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말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금수강산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지 않을까? 2032년 남북한 올림픽이 개최될 때, 우리는 너무도 자랑스럽게 한반도를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또 세계 최고 중의 최고만이 등재될 수 있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은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우경식 강원대 교수·지질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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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9일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그 세부조치로 북한은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하에 영구적으로 폐기하기로 했다. 또 6·1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은 전 세계로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조선반도를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기로 확약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처음 육성으로 ‘비핵화’를 확약한 것은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큰 가시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의 육성이 갖는 권위와 무게감을 감안하면 이만큼 확고한 비핵화 의지도 드물 터이다. 김 위원장의 비핵화 약속을 환영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오전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한반도 전역의 전쟁 위험 해소 등을 담은 ‘9월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한 뒤 합의서를 들어보이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4·27 판문점선언에서 남북이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고 한 것에 비하면 이번 9월 평양공동선언은 한발 더 들어가 실질적인 세부조치를 담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북·미 간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비핵화 방안을 남북이 처음으로 합의한 것도 의미가 크다. 평양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이 비핵화를 공식 의제로 삼고 실천 방안까지 도출함으로써 남북대화가 북·미관계를 이끌어가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됐다고 평가해도 어색하지 않다.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하에 영구폐기하기로 한 것은 북한이 비핵화 과정에서 거쳐야 할 국제사회의 검증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전향적이다. 핵시설이 아닌 운반체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향후 북·미 협상이 진전될 경우 핵시설 검증도 수용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 등 추가조치에 ‘미국의 상응조치’라는 단서가 붙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북·미 정상회담 이후 후속협상 과정에서 불신이 커진 상황에서 북한이 조건 없이 나서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미국과의 협상에서나 사용할 카드를 남북대화에서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두 정상이) 공동선언 내용 외에도 많은 논의를 했다”고 밝힌 것을 보면 이번에 공개된 것 외에 비핵화 조치가 더 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정상이 이틀간에 걸쳐 충분한 시간을 갖고 북·미대화에 탄력을 부여할 다양한 방안을 깊숙이 논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정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방문 약속도 비핵화와 관련지어 비상하게 음미해볼 대목이다.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비핵화와 별개로 생각하기 어렵다. 비핵화와 남북관계가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 현실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서울을 방문하기 전까지 비핵화와 관련한 신뢰를 쌓지 않을 수 없다. 김 위원장은 이번에 서울방문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그렇게 하겠다는 각오를 비친 셈이다.

김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강력한 비핵화 실천 의지를 밝힘으로써 공은 다시 미국으로 넘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9월 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 트위터에서 “매우 흥분된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이 어떻게 정리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상응조치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 같은 추가조치 용의를 분명히 밝힌 점, 김 위원장이 육성으로 비핵화 의지를 확약한 것을 미국이 가볍게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주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하는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이 석달간 멈춰 있던 한반도평화 프로세스가 다시 움직이는 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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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포용국가’를 내걸었다. 포용국가는 사회정책의 국가비전이다. ‘모두를 위한 나라, 다 함께 잘 사는 포용국가’가 이 비전의 이름이다. 포용국가의 목표는 세 가지다.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을 추구하고, 배제와 독식이 아니라 공존과 상생을 도모하며, 미래를 향해 혁신하는 사회를 일구겠다는 것이다.

포용국가는 3대 비전으로 이뤄져 있다. ‘사회통합 강화’ ‘사회적 지속가능성 확보’ ‘사회혁신 능력 배양’이 그것이다. 이 비전들은 다시 각 3개씩의 세부 정책 목표를 갖고 있다. 이른바 ‘9대 전략’이다. 정부는 포용국가의 실현을 위해 ‘국민 전 생애 기본생활보장 3개년 계획’을 마련하고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포용국가론에서 내 시선을 끈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이다.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어느 정부든 집권 5년의 시간을 고려한 국정 운영 로드맵을 마련했다. 그 로드맵은 대개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먼저 국가비전에 걸맞은 정책을 추진하고, 이어 이를 통해 도약을 모색한 다음, 마지막으로 안정적으로 국정을 마무리하려는 장기 계획이 그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집권 2년에 제시하는 비전과 정책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청사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선 이명박 정부는 집권 2년에 ‘친서민 중도실용’을, 박근혜 정부는 ‘통일 대박’과 ‘규제 개혁’을 내걸었다. 현재 시점에서 친서민 중도실용, 통일 대박, 규제 개혁이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주목할 건 정부의 입장에서 집권 첫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지난 1년여 동안 문재인 정부가 주력했던 세 과제는 적폐 청산,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한반도 평화 정착이었다. 적폐 청산이 낡은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면, 나머지 두 과제는 국정의 양대 영역인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에 관한 것이다. 집권 중반기로 향해가는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과제에 더하여 사회 분야 비전으로서의 포용국가를 내놓은 셈이다.

둘째는 포용국가를 이루기 위한 조건이다. 앞서 말했듯이 포용국가는 9대 전략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소득 불평등 완화를 위한 소득보장제도 개혁, 공정사회를 위한 기회와 권한의 공평한 배분, 사회통합을 위한 지역균형발전 추진이 ‘사회통합 강화’를 위한 3대 전략이라면, 저출산·고령사회 대비 능동적 사회시스템 구축, 사회서비스의 공공성·신뢰성 강화 및 일자리 창출, 일상생활의 안전 보장과 생명의 존중이 ‘사회적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3대 전략이다. 그리고 ‘사회혁신 능력 배양’을 위한 3대 전략으로는 인적 자본의 창의성·다양성 증진, 성인기 인적역량 강화와 사람 중심의 일터 혁신, 경제-일자리 선순환을 위한 고용안전망 구축이 제시된다.

2018남북정상회담평양’의 첫 날인 18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이 환영나온 평양 시민들에게 손흔들어 답례하는 장면이 이날 서울 중구 DDP프레스센터에 생중계 되고 있다. 연합뉴스

9대 전략은 현재 우리 사회가 마주한 국가적 과제들인 일자리 창출, 불평등 해소, 인구절벽 대응 등을 적절히 고려하고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포용이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시대적 가치임은 분명하다.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도 포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평등은 ‘배제’에 맞서는 ‘포용’으로 재정의돼야 하고, 정부의 일차적 과제는 ‘찢겨진 사회’를 ‘포용적 공동체’로 재구조화하는 데 있다고 역설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포용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조건이다. 포용국가를 성취하기 위해선 정책 구현을 위한 법적 제도의 정비 및 구축이 요구되고, 이를 위해선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문제는 정치사회의 현실이다. 현재 정치사회는 국민을 둘로 나누는 능력은 탁월해도 이견을 조정하고 타협을 도출하는 역량은 허약하다. 더욱이 여소야대 상황은 새로운 법적 제도를 완비하는 데 작지 않은 어려움을 안겨준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포용적 정치의 중요성이다. 지난 1년여의 국정 운영을 돌아보면 역시 ‘문제는 경제’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쟁에서 볼 수 있듯, 정부에 이른바 ‘먹고사니즘’만큼 더 중요한 대내적 과제는 없다.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에서 앞으로 어떤 성과를 낼 것인지에 문재인 정부의 성패가 달려 있으며, 이 과정에선 무엇보다 국회와의 협치가 필수조건이다.

저성장과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포용적 성장과 포용적 복지를 일궈야 한다. 이를 위해선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주장한 바 있는 포용적 정치를 정부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문제는 경제’인 만큼 ‘문제는 역시 정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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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6·25 때 단신 월남한 실향민이지만 고향 얘기는 잘하지 않으신다. 80대 중반의 연세로 남쪽에서 보낸 세월이 북쪽에서 살았던 시간의 네 배가 넘으니 기억과 애착이 차츰 바래서인지도 모른다. 월남할 당시 황해도 연백의 고향에는 어머니와 네 살배기 늦둥이 동생만 있었다니, 오래전에 돌아가셨을 어머니 연세를 떠올리고는 그리움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띄엄띄엄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나도 어려서부터 들어온 이야기에 어느덧 황해도민의 정서에 동화된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향을 물으면 대뜸 “황해도 연백이오!” 해놓고는 “사실은 파주에 터를 잡고 내내 살았지만…” 운운하며 설명을 붙이곤 한다. 사람들은 황해도가 고향이라는 내 대답을 농담으로만 듣고 “내가 만주 개장사 시절에 말이야” 하면서 웃음을 터뜨리곤 하지만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옥류관 평양냉면을 먹고 있다. 연합뉴스

실향민의 향수 같은 건 별로 내보이지 않는 아버지이지만 1994년 무렵 자유로가 개통되어 가족들이 함께 강 건너 북한 땅을 보러 갔을 때는 조금 달랐다. 자유로를 달리다가 오두산 통일전망대쯤에 이르면, 한강이 임진강과 합쳐지고 강 건너편이 김포에서 북한 땅으로 바뀐다. 차에서 내려 멀리 강 건너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갑자기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적이 별로 없었기에 우리들은 당황했다. 형이 아버지를 진정시킨답시고 다가가 말했다. “아버지, 그쪽이 아닌데요. 북쪽은 저쪽이에요.”

아버지는 잘살지도,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연백평야 중농 집안의 맏아들로 17살 나이에 해주에 유학을 나가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터지고 몇 개월 후 인민군이 후퇴하는 와중에 징집을 당했다. 후퇴하는 도중 부대가 깨져서 고향에 돌아오니 전쟁이 스치듯 지나갔는지 평온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다시 해주의 학교를 다니기도 했단다. 1·4 후퇴 때 탈영병 신세가 될 것 같아 연백의 넓디넓은 갯벌을 걷다 쪽배를 타다 하며 강화도로 월남을 했다. 이북 출신인 데다 학교에서 배운 러시아어와 영어 실력이 제법이어서 일명 ‘켈로부대’로 불리는 미군 8240부대에 입대를 했단다. 켈로부대에서는 무시무시한 북파공작원 따위는 아니고 그냥 첩보 분석을 하며 지냈나보다. 부대가 강화 교동도에 있었다는데, 바다 건너편의 고향땅을 보며 가슴이 많이 메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는 다시 국군에 정식 입대를 하여 꼬박 복무기간을 마쳤다니, 인민군, 미군, 한국군을 모두 거친 희귀한 경우다. 아버지는 남쪽에 살던 먼 일가붙이 아저씨의 중매로 역시 개성 인근에 살다 일가족이 함께 월남한 어머니를 만났다. 그러고는 역시 미군과의 인연으로 미군 군속으로 취직해 잡다한 노무와 건축일 등을 배우고는 결국 평생의 직업으로 삼았다.

이북사람들답게 우리 집은 내가 어릴 때부터 냉면과 만두를 상식하곤 했다. 겨울이 되면 만두를 수백 개씩 빚어 얼려두고 먹었고, 식구가 외식을 하면 냉면을 먹는 일도 잦았다. 내 기억 속의 첫 냉면은 초등학교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서울 구파발에 있는 한 이북식 냉면집에서 먹었던 것이다. 사실은 냉면보다 함께 사주신 불고기가 훨씬 맛있었지만. 나는 머리가 커서야 이 집안 내력에 허구가 숨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연백 촌구석 출신의 17살 소년이 냉면을 먹었으면 얼마나 먹었고 무슨 맛을 알았을까. 하지만 언젠가 아버지를 모시고 양평 가는 초입에 자리한 옥천의 냉면을 먹으러 갔을 때, 당신의 설명을 듣고는 그 허구를 믿기로 했다. “해주냉면이란 것도 있단다. 황해도 사람들도 평양 못지않게 냉면을 많이 먹는데, 여기 냉면이 딱 그 맛이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지난 금요일, 전국의 평양냉면 집들마다 손님이 줄을 섰단다. 나도 프레스센터가 차려진 일산 킨텍스 근처에서 평양냉면을 먹었다. 손님이 많아서 2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정상회담의 내용만큼이나 평양냉면에 쏟는 사람들의 관심이 재미있었다. 사람들에게는 비핵화와 종전 선언을 둘러싼 골치 아픈 정치적 분석과 CVID 등의 어려운 용어보다 ‘평양냉면’이라는 정서적 상징이면 충분한 것이다. 평화는 고도의 정치적 협상에 앞서 사람들의 마음에서부터 온다.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토록 컸는지를 평양냉면 그릇 속에서 새삼 읽는다. 그러나 나는 심드렁해진 아버지의 마음처럼 이제는 통일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 본다. 통일은 상징화된 이념일 뿐, 거기까지 가는 데 지불해야 할 고통과 혼란을 생각하면 절대선일 수 없다. 남북이 자유롭게 교류하고 전쟁이 더 이상 없다면, 후퇴할 수 없는 평화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부디 우리에게 평화가 있기를!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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